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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ssy Dec 12. 2022

내가 먹은 게 흑돼지가 아니라 멧돼지?

<후딴>과 <히땀>의 큰 차이

인도네시아인의 87%는 무슬림이고 돼지고기는 금기 식품이라 돼지고기 관련 어떤 성분도 들어있지 않음을 입증하는 <할랄> 허가를 받아야만 인도네시아 내 수입이 가능할 정도다. 발리는 힌두교라 돼지고기가 유통 가능하고 다른 지역은 외국계 마트에서만 돼지고기가 유통된다.


일 두 시간 정도씩 우리 집 집안일을 돕는 도우미 에카는 가톨릭이고 돼지고기 먹는다. 그녀는 좋은 물건이 있으면 저렴한 가격에 사서 원하는 사람들에게 팔기도 하는데 지난 금요일에 갑자기 나에게 물었다.

"Mau coba babi hutan?"< 멧돼지 한번 먹어 볼래요?>

"Babi hitam?"<흑돼지요?>

"Iya, babi hitam."<네, 까만 돼지요>

인도네시아어로 <hitam>은 <검은색>이란 뜻이고 <hutan> 은 <숲>이란 뜻이다.

에카와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난 제주에만 있다는 그 <흑돼지>를 떠올렸고 은근 기대를 했다.

잘하면 제주 흑돼지를 여기서 저렴하게 맛볼 수도 있겠구나..

"Iya, mau satu porsi coba dulu. Kalo enak, mau pesan lagi Eka"<그래요 에카, 일단 한 접시 먼저 주문할게요, 먹어보고 맛있으면 더 시키는 걸로 하고요>


토요일 저녁, 작은 아이와 우리 부부는 아이가 화요일 학교 오케스트라에서 입을 까만색 셔츠를 사러 몰을 들렀고 집으로 돌아와 보니 초록색 비닐봉지가 현관문 손잡이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비닐봉지를 열어보니 안쪽은 양념류가 흐르지 않도록 잘 코팅된 갈색 종이 안에 뭔가 잘 포장되어있다. 흙갈색으로 맛스럽게 양념된 기다리던 흑돼지다. 호기심반 기대 반으로 어서 포장된 종이를 열고 젓가락으로 한 점 집어 입으로 넣어 오물오물 씹어본다. 어... 근데 좀 질기다. 에이 한 점 정도는 좀 질길 수도 있지 뭐 하곤 또 다른 고기를 집어 본다. 역시나 많이 질기다.


곁에서 지켜보던 남편이 한 소리한다.

"거참. 그렇게 아무거나 좀 먹지 마. 그러다 배탈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겁도 없이 말이야."

"흑돼지랬는데 왜 이렇게 질기지? 양념된 건 보통 질긴 고기도 부드러워지는데 도통 씹어지질 않네. 그래도 아까우니까 좀 더 먹어보고.."

음식 버리는 걸 병적으로 싫어하는 나는 씹어지기만 하면 먹을 생각이었지만 조금 큼지막한 깍둑 모양의 흑돼지는 도무지 씹힐 생각이 없고 씹어도 씹어도 여전히 덩어리째인 고기를 나는 삼킬 재간이 없다. 수차례 시도 끝에 불가능을 감지한 난 두 팔 올려 항복을 선언하고 아직 많이 남은 아까운 흑돼지고기는 쓰레기통에 버지고 말았다.


오늘 아침, 에카가 출근했돼지고기 맛이 어땠냐고 물었다. 나는 양념은 맛있었지만 고기는 너무 질겨서 씹을 수도 삼킬 수도 없었다고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그래서 그 남은 고기를 어쨌냐길래 할 수없이 버렸다고 했더니 늘 에너지 가득인 그녀의 얼굴에 조금 실망스러운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좀 미안했다.


월, 수 오전에 영어 공부하러 친구가 방문하는데 도대체 무슨 대화가 오가는 건지 궁금해하길래 자초지종을 설명했더니 에카가 다시 이야기한다.

"Babi hutan itu enak sekali.."< 멧돼지 정말 맛있는데..>

"Eh?? Babi hutan? Bukan babi hitam?"<에? 멧돼지라고? 흑돼지가 아니라?>

"Babi hutan itu babi hitam."<멧돼지는 까만색 돼지예요.>


아뿔싸. 에카는 첨부터 멧돼지라 말했는데 나는 나의 상상 가능 범주의 흑돼지를 생각했고 내가 흑돼지냐고 물었을 때 그녀는 <그래 멧돼지, 까만색 돼지 맞아. 보통의 흰색 돼지 말고>라고 한 것이다.


내가 멧돼지 고기를 입에 넣고 그렇게 씹어댄 걸 생각하니 삼키지 않은 게 얼마나 다행인지..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 한 점 정도는 삼킨 것 같기도 하고...


멧돼지 고기를 열심히 씹어댄 사실을 깨닫자마자 남편에게 카톡을 보냈다.

"내가 먹은 거 흑돼지가 아니라 멧돼지였어. 산을 날뛰면서 단련된 근육의 야생 멧돼지라 그렇게 엄청 질겼나 봐..ㅠ"

"아이고.. 그러게 아무거나 좀 먹지 말고 잘 알아보고 먹어야지.. 어쩐지 좀 이상하더라니..

그나저나 너무 웃기네. 자기는 살면서 야생 멧돼지 맛도 다 보고 하하하" 남편은 깔깔대며 나를 놀려댔다.


<오늘의 교훈 : 듣기 실력을 좀 향상시키자. 내가 듣고 싶은 대로 듣기 없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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