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나를 알아봐주기

˚₊ ˚ ‧₊ .:·˚₊ ˚ ‧₊ .:·˚₊ *˚ ㅣ유체이탈

by 윤슬




오랜만에 만난 정돈된 집에서 재료들을 긁어모아 밥을 차렸다. 계란과 냉동 파가 들어간 계란말이. 마지막 남은 묵은지를 긁어모아 만든 김치찌개. 갓 지은 흰 쌀밥. 얼마만에 차려보는 식사인지. 대단하지도 않은 상이지만 한입 한입을 더없이 크게 떠서 먹었다. 오랜만에 허기가 채워졌다.

늘 배고팠던 나는 정말 오랜만에.



바닥에 작은 상을 펴놓고 식사를 했다. 미뤄왔던 식사여서 그런지 정신없이 먹었다. 정신없는 식사뒤에는 나른해지는 듯하여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그러면 느껴지는 침대. 그래 나는 늘 이렇게 침대 앞에 상을 피고 바닥에 앉아 밥을 먹었다. 침대에 등을 기대고서.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움직이는데 다섯 걸음이면 충분한 작은 방. 방 안에서 움직일 때 일부러 보폭을 좁혀서 걸음 수를 늘려 걸었다. 그러면 조금이라도 넓게 느껴질까봐서. 별 소용은 없었지만… 지금 기대어 있는 침대는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던 곳이다. 침대 옆에는 책상이 붙어있다. 잠에 들지 못하는 밤이 시작할 때쯤. 긴 새벽의 시간을 소모시키기위해서 새벽에 글을 끄적이곤 했다. 누워서 손만 뻗어도 닿는 가까운 곳에 메모지를 두고 한 손에 집어, 창문을 통해 새어들어오는 작은 빛에 의존해 떠오르는 잔상들을 휘갈겨 적었었다. 다 정리한 줄 알았는데 침대 아래엔 잔뜩 구겨 버려놓은 종이들이 몇몇 보인다. 그 새벽 나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나. 별을 세고 싶어. 새벽이 어서 지났으면 좋겠어. 아니면 영영 어두운 밤의 세상에 살면 좋겠어. 뛰어도 숨이 차지 않는 세상은 어떨까. 작은 것 하나 잊지 못해 늘 생각이 많았는데, 최근 들어서는 다 내려놓고 싶다는 생각 한가지에만 골몰해. 다른 어떤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생각은 나를 불안해 하기도 했지만 나를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기도 했다. 나는 불안해서 힘들었지만, 불안을 해결하기 위해 움직였다. 그래서 나는 불안을 미워할 수만은 없었다. 나를 움직이게 하는 근본의 힘이 바로 불안이란 걸 나는 알았기 때문에. 모든 일 앞에서 최악의 시나리오를 쓰고 그 상황에 들어가 문제를 해결하는 히어로같은 나를 상상했다. 그렇게 가장 힘든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알고나면 나머지 작은 일들은 우습다. 이제 무슨일이든 해결할 수 있는 내가 된다. 물론 실제는 내 상상과는 달라서 내 상상력이 미치지 않는 범위에서 또 다른 최악의 상황이 나타나 나를 괴롭혔지만 그럼에도. 불안을 동력으로 움직이는 일은 멈추지 않았다. 어려운 일을 척척 해결해내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나는 강해졌다.




생각의 조각이 담긴 종이들을 보다보니. 책상 위 책장에 헐겁게 꽂아놓은 책들에 눈이 갔다. 불안이 내 움직임의 동력이었다면, 책은 내 상상의 동력이었다. 최대한 짐을 줄여야 할 걸 알면서도 놓고 갈 수는 없다며 꾸역꾸역 배낭에 지고 왔던 책들이었다. 가지고오고 싶은 책들이 더 많았는데, 이곳에 와서 더 채워넣을 생각을 하며 채워넣을 수 있을 정도로 추리고 추려서 챙겨온 책들이었다. 가져올 책들을 고르느라 꽤 고민했었는데 와서는 몇 번이나 들여다 보았는지 모르겠다. 품에 고이 안고 온 책들. 오랜만에 그 중 한 권을 꺼내 들춰보기로 했다. 책을 만지는 손가락의 울렁거림을 느낀다. 맞다 나는 지금 육체를 벗어나 있지. 다행히 조금 울렁거릴 뿐 책을 손에 쥘 수 있었다. 아끼던 책을 넘긴다. 이곳저곳에 플래그로 표시가 되어있다. 표시된 장들을 한장씩 넘겨보다 어떤 문장 위에 눈길이 멈췄다. 전에 표시해놓은 문장 바로 아래. ……옷을 입힌 육신에게 모든 일을 처리하게 하고, 자기는 침대에 남아 있는 것이다.* 옷을 입은 나의 육신은 지금 세면에에 머리가 박힌 괴기한 모습으로 멈춰있다. 그 몸에는 움직일 수 있는 어떤 힘같은 것이 남아있을까. 할 수만 있다면. 나의 옷을 입힌 육신에게 모든 일을 시키고 싶다. 그리고 나는 육체의 감옥에서 벗어나 가벼움의 옷을 입고서 침대에 누워있는 것이다. 해결하지 못한 모든 짐을 잔뜩 끌어안고 그 무게에 눌린 채 침대에 눕는 것이 아니라. 모든 짐을 벗어던지고 날아갈 것 같은 가뿐한 기분으로 침대에 눕는 것이다. 그러려면 저 육체에게 움직일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할 텐데.






*『사람,장소,환대』의 한 구절 입니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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