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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귤 Oct 13. 2021

Oblivion

song by Grimes

아픈 경험을 예술로 표현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그것이 성폭행이라면. 하지만 클레어 부셰는 그 끔찍한 기억을 담아 음악으로 만들었고, 노래는 수많은 매체에서 극찬을 받으며 그라임즈의 위치를 급부상시켰다. 대표적으로 피치포크에서는 2012년 싱글 결산 1위 및 2010년대 싱글 전체 결산 2위를, NME에서는 올 타임 500 리스트에서 229위를 부여했다. 깐깐한 힙스터들의 평점 사이트 Rate Your Music에서도 5점 만점에 4.1점으로 2012년 2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외부의 평가만으로 노래를 설명할 수는 없으나, 그만큼 “Oblivion”은 그녀의 커리어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을 장식하는 곡이다.


조르지오 모로더의 느낌의 낮은 신스 멜로디로 시작해 블랙홀을 형상화한 듯한 두-왑 스타일의 리프로 끝날 때까지, 노래는 천천히 스며들면서 몸을 장악한다. 칫- 칫- 거리는 스네어 트랙과 살랑이는 보컬, 복잡하게 움직이는 건반 노트, 그 위에 안개처럼 뿌연 신디사이저 이펙트가 차례로 등장하는 정교한 구성을 듣다 보면 마치 우주의 암흑 속으로 빨려가는 느낌이다. 비교적 친절하게 들리는 가사는 오묘한 댄스 그루브와 함께 노래 뒤에 숨은 공포의 순간을 흥미롭게 전달한다. 성폭력의 후유증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과연 이 곡을 즐겨야 하나 싶지만, 만약 이를 원치 않았다면 그라임즈는 이 곡을 아예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때로 어떤 기억은 단순히 덮어두기보다 끄집어내서 마주해야 치유되기도 하니까. 그러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이 곡을 듣고 나누는 일이겠다.


(원 게시일: 20.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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