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ng by Grimes
나는 데모를 잘 듣지 않는다. 뭐 특별한 이유보다는, 어쨌든 하나의 노래에 대한 최종 완성본이 있다면 그걸 듣는 게 좀 더 이치에 맞지 않나 하는 생각에서다. 하지만 가끔 그런 내 주관을 벗어나는 예시가 있다. “REALiTi”가 그중 하나다. 노래가 나온 순서와는 달리, 나는 Art Angels를 먼저 들은 사람이었기에 (아닐 수도 있지만 유의미한 차이는 없다) 앨범 버전이 처음에는 익숙했다. 하지만 데모를 드높이는 인터넷 여론에 휘말린 것인지, 아니면 뮤직비디오를 보다 보니 익숙해진 것인지 지금에는 나 또한 데모를 더 자주 듣는다.
두 버전의 가장 큰 차이를 한 단어로 요약하자면 “해상도”가 가장 적절한 표현일 것 같다. 기타 사운드나 온갖 리듬, 그리고 보컬까지 기교가 다소 들어간 Art Angels 버전은 1080p 영상을 보는 느낌이라면, 넘실대는 신스 사운드나 애써 힘주지 않고 흐느적거리는 그라임즈의 목소리가 있는 데모 버전은 마치 360p 영상을 유튜브에서 시청하고 있는 기분이다. 그리고 죽음을 소재로 하여 매일 아침 오르는 산과 같은 자연을 노래하는 다소 추상적인 가사를 더욱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것은 아무래도 초연한 분위기의 데모가 아닐까 싶다. 노래가 어떻게 완성되는지는 사실 창작자의 몫이니 둘 중 어떤 것이 더 좋은지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겠다. 그저 그녀의 비전을 존중하면서, 그냥 내가 좋아하는 것을 골라 들으면 되는 것일 뿐. 다만 그라임즈의 전체 디스코그래피에서 노래 순위를 매긴다면, 아마 특별히 “REALIiTi (Demo)”라고 표기할 것 같다.
(원 게시일: 20.1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