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idi Primes

album by Grimes

by 감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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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듄>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31분간의 기묘한 우주적 제례 의식. 클레어 부셰의 독창적인 면모는 10년 전 첫 시작부터 뚜렷했다.

그라임즈라는 이름을 달고 인디 씬의 혜성으로 우뚝 선 이후에도 클레어 부셰는 본인의 오타쿠 면모를 버리지 않았다. 그러나 20대 초반에 발매한 첫 앨범 Geidi Primes에는 유독 그녀의 매니악한 취향이 짙게 칠해져 있다. 프랭크 허버트의 소설 <듄 (Dune)> 시리즈를 감명 깊게 본 그녀는 제목부터 본 소설 속 행성의 명칭을 따와 완성했다. 그리고 이러한 레퍼런스는 단순히 앨범 제목에만 그치지 않고, 온갖 트랙명의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첫 트랙 “Caladan”은 작품 속 동명의 행성의 이름이고, “Sardaukar Levenbrech”는 작중 등장하는 군대의 계급을 의미한다. “Zoal, Face Dancer”에서 Face Dancer는 모습을 변신하는 이들을 일컫는 단어이고, “Feyd Rautha Dark Heart”는 1권의 악역인 Feyd-Rautha의 이름에서 따왔다. 심지어 마지막 두 트랙의 제목인 “Shadout Mapes”와 “Beast Infection”은 각각 조연 인물의 이름과 Glossu Rabban이라는 등장 인물의 별명 Beast를 뜻한다. 사실상 그라임즈는 앨범 하나를 <듄>에 대한 헌사로 바치는 것이다.


소설 원작을 읽었거나, 데이비드 린치의 1984년 작품을 관람한 이들에게는 상당히 재밌는 요소겠지만, 이런 숨은 텍스트에 대한 정보 없이도 Geidi Primes는 충분히 들을만한 작품이다. 로-파이 질감과 주술적인 음성, 마림바 사운드가 합쳐진 오프너 “Caladan”은 그녀의 초기 작품임에도 이후 우리가 만나게 되는 기이한 팝스타로서의 그녀를 적극적으로 암시한다. 음산하지만 마냥 불쾌하진 않은, 마치 아리 애스터의 영화 <미드 소마>의 축제 의식을 담아낸 느낌이다. 피지카토 주법이 쓰인 듯 두툼하게 튕기는 스트링 사운드가 이목을 끄는 “Sardaukar Levenbrech”는 일렉트로닉 성향이 완전히 자리 잡기 전의 그녀를 보여주고 있다. Geidi Primes의 진정한 흥미로움은 이런 면에서 비롯한다. 군데군데 들어간, 그녀의 이후 음악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우주적인 느낌 아래에 깔린 마치 원시 고대 문명 같은 소리가 이 우리를 마주한다.


많은 대중에게 그라임즈의 시그니쳐 포인트가 된 병약하고 날카로운 보컬 대신에 앨범은 흐느적거리며 늘어지는 그녀의 음색을 담아낸다. “Zoal, Face Dancer”에서 클레어 부셰의 목소리는 힘없어 보이는 것 같지만, 오히려 그렇게 말초적으로 자극하지 않는 느낌이 매력적이다. 그리고 “Rosa”의 그루브한 베이스 리프 위를 맴돌며 “우- 우-” 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딱딱거리는 퍼커션과 오묘하게 맞아떨어진다. 신디사이저가 우주적인 기운을 가득 내뿜는 “Avi”는 앨범에서 가장 댄서블한 트랙 중 하나로, 인디 SF 영화의 훌륭한 사운드트랙이 될 것만 같다. 애초에 듄에 대한 레퍼런스가 담겨 있으니 이는 당연하다고 볼 수도 있다.


엇박자로 반복되며 재등장한 로-파이 분위기와 급격한 전개 변화까지 넣은 “Gambang”, 그리고 후방에 작게 배치된 일렉트릭 기타 사운드가 어두운 느낌을 물씬 풍기는 “Venus in Fleurs”의 기묘함은 살짝 더 스산해진 후반부의 흐름을 흥미롭게 이끌고 나간다. 러시아 시 작품에서 가사를 가져온 것으로 알려진 “Grisgris”는 그녀의 한계 없는 문화적 레퍼런스를 다시 보여주고, 앨범을 마무리 짓는 “Shadout Mapes”와 “Beast Infection”은 다시 한번 주술적인 느낌을 강화한다. 31분밖에 되지 않는 짧은 음반이라 훅 시작했다 훅 끝나는 느낌도 드나 그 순간의 인상만큼은 강렬하다.


다양한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상당히 파편화되어 실제 언어인지도 모르겠는 가사와 그다지 직관적이지는 않은 멜로디가 조합된 탓에, Geidi Primes에는 특별하게 뚜렷이 각인되는 트랙들은 존재하지 않는 편이다. 하지만 싱글 단위 인상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난다면 앨범이 지닌 자체적인 기이한 매력에 빠질 수 있다. 흐릿하지만 어설프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소재 차용 면에서는 온갖 사회 병폐를 담아낸 가장 최근작 Miss Anthropocene보다 오히려 과감하고, 음산하면서도 기묘한 분위기는 Visions에 꿇리지 않는다. 오히려 날것처럼 들리는 프로덕션이 주는 흥미로움이 있다. 12년도에 마치 빅뱅처럼 본격적인 인디 씬의 대표 주자로 등극하기 전 몬트리올의 신인 DIY 뮤지션 시절의 음악에서도, 클레어 부셰의 독특한 세계는 이렇듯 꿈틀대며 태동하고 있었다.


(원 게시일: 20.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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