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bum by Carly Rae Jepsen
팝의 새로운 클래식으로 자리매김한 E•MO•TION 이후 4년이 지났다. 물론 그동안 그녀는 16년에 해당 세션의 미 발매곡들을 모은 여덟 트랙 EP인 E•MO•TION: Side B를 내놓았고, 17년도 최고의 트랙 중 하나인 “Cut to the Feeling”을 내기도 했다. 그러나 스튜디오 앨범으로 4년이라는 시간은 결코 짧지 않은 공백기다. 과연 칼리 레이 젭슨은 전작에서 펼친 화려한 음악적 변신과 질적인 상승을 그대로 이어나갈 수 있을 것인가? 물론 불안감보다는 기대에 가까운 질문이었다. 그녀는 분명 신뢰가 가는 송라이터이니까.
그리고 Dedicated는 이 질문에 대한 훌륭한 답변이다. 힙합 등의 “뉴 메인스트림” 적인 요소가 섞이지 않은 퓨어 팝의 영역을 굳건히 지키면서, 그녀의 네 번째 앨범은 E•MO•TION 앨범의 거의 유일한 빈틈이었던 본인의 희미한 캐릭터까지 잡아낸다. 어디서나 볼 수 있을 것 같던 로맨스 매체 속 옆집 여주인공에서, 그녀는 즐겁고 여유롭게 상대방을 침대 위로 초대하는 매혹적인 여인으로 변했다. (비록 둘이 이루는 섹스에 대한 노래는 아니지만) 첫 싱글인 “Party for One”만 봐도 그렇다. 그녀는 2010년대에 자위라는 토픽을 즐거우면서도 전혀 외설적이지 않은 것처럼 당당히 다룰 수 있는 몇 안 되는 작사가이다.
사랑을 나눌 방과 침대라는 공간이 구체적으로 언급되는 “Want You in My Room”은 담대해진 앨범 콘셉트의 가장 훌륭한 예시가 된다. “너에게 못된 짓을 하고 싶어. 내 창문으로 넘어와.” 전혀 의도하지 않은 것처럼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가벼운 신디사이저 비트에 맞춰 노래하지만, 스크린 속 마릴린 먼로와 같은 에로틱한 백치미 여성이 되는 대신 그녀는 능동적으로 상대방을 자신의 품으로 끌어들이는 인물이 된다. 해리 닐슨이 작곡한 애니메이션 <뽀빠이>의 사운드트랙 “He Needs Me”를 리어레인지한 “Everything He Needs”에서는 그런가 하면 다른 것 못지않게 육체적, 성적으로도 자신을 매력 넘치는 인물로 형상화하는 데에 성공한다. 한편으로 스카 장르의 트랙인 “I’ll Be Your Girl”에서는 다른 여자에게 가버린 연인을 붙잡으려 하면서, 순순히 침대 위에서 “당신의 여자”가 되길 애원한다. 한가지 스탠스에만 서 있지 않고 다각적으로 섹스라는 토픽을 훌륭하게 다루는 그녀의 솜씨가 엿보인다.
이런 보다 우아하게 섹시해진 가사 못지않게 앨범에서는 보컬리스트로서의 그녀의 성장도 발견할 수 있다. 대체로 정직하게 노래하던 그전 앨범과 달리 호흡을 적절히 분배하며 기분 좋게 갈라지는 목소리는 Dedicated가 한 단계 진일보한 앨범임을 드러낸다. 훵키한 기타가 이목을 끄는 앨범 오프너 “Julien”은 이런 탁월함을 강하게 느낄 수 있다. 속삭이듯이 전 애인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하는 곡에서 그녀의 허스키한 목소리는 이러한 정서를 더 심화시켜 우리를 그 아련한 감성에 젖게 한다. 이런 보컬 운용이 없었다면 제목처럼 약에 취한 듯 몽롱한 분위기에 빠지는 “No Drug Like Me”의 매력은 반도 채 되지 못했을 것이고, 차분한 신스팝 트랙 “Too Much”는 결코 이렇게 빛을 발하지 못했을 것이다. 비교적 특색 없이 흘러가는 “Right Words Wrong Time” 같은 트랙도 발전한 칼리 레이 젭슨의 보컬 덕에 생명력을 얻는다.
프로덕션의 측면에서도 Dedicated는 결코 뒤쳐지지 않는다. “The Sound”와 “For Sure”가 유달리 돋보이는데, “The Sound”는 정갈한 피아노 멜로디로 시작했지만 “말은 내게 필요 없어, 내가 원하는 것은 소리 뿐”이라는 가사에 맞춰 자연스레 끼어드는 댄서블한 비트의 분위기 전환이 신선하다. “Real Love”와 “Party for One”의 사이에 끼어 그 둘의 다리 역할을 하는 “For Sure”는 아카펠라와 박수 비트 위주로 구성된 언플러그드 사운드가 정교하게 조성하는 공간감이 뛰어나, 좋은 인터루드 느낌이면서도 엄연히 독립된 하나의 곡이 된다. 스탠다드 에디션의 마지막 트랙으로 여정을 마무리하는 부드러운 보컬의 “Real Love”도 빼놓을 수 없다. 드롭에서 뿜어져 나오는 색소폰 사운드는 마치 가사 속 진실한 사랑을 열망하는 그녀의 감정을 그대로 표현하는 듯 느껴진다.
안타깝게도 살짝 힘 빠지는 순간들도 더러 있다. “Happy Not Knowing”은 초반부의 환상적인 트랙들의 연속에 비하면 특별할 것 없는 노래고, 2인조 밴드 Electric Guest가 참여한 “Feels Right”은 길거리 페스티벌용 음악 그 이상을 내지 못한다. 그리고 생각보다 싱글로 선정되었던 곡들에서 밋밋함이 느껴진다. EDM 작법을 다소 많이 빌려온 두 번째 싱글 “Now That I Found You”, 그리고 업 템포 댄스 팝 “Party for One”의 경우는 이렇다 보니 기존의 팝에서 한 방향 꺾은 시도가 많은 앨범 내에서 상대적으로 평범하게 들린다. 그래도 귀를 잡아끄는 멜로디 덕분에 이런 익숙함은 진부함으로 느껴지기보다, 칼리 레이 젭슨이 정공법으로도 여전히 기분 좋은 팝을 능숙하게 만들어내는 뮤지션임을 증명해주는 듯이 보인다. 다소 뻔한 음악이라 할지라도 그녀의 손길이 가해지면 조금 더 말끔해지는 것이 분명히 있다.
분명 칼리 레이 젭슨은 meme과 바이럴 히트의 도움으로 세상에 존재감을 처음 드러낸 인물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단순히 유행에 편승해 잠깐의 흔적을 남긴 채 스쳐 지나가는 음악을 만들기보다는 자신만의 확고한 팝의 세계를 열심히, 그리고 훌륭하게 꾸려나가고 있다. 장르로서의 팝에 통달한 그녀의 솜씨가 쏟아 부어진 음반은 올뮤직이 붙여준 팝 마스터클래스라는 칭호가 가히 아깝지 않다. 15년도의 E•MO•TION이 팝이라는 장르의 규칙을 재정립한 하나의 룰 북이라면, Dedicated는 더 나아가 현시대 퓨어 팝의 생존 전략을 알려주는 지도와도 같은 작품이다. 그녀만큼 팝 음악에 헌신적인 아티스트가 또 있을까? 칼리 레이 젭슨 외에 다른 인물을 떠올리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원 게시일: 20.06.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