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bum by Grimes
원시행성에서 출발했던 클레어 부셰는 이제 어두운 우주로 나아간다. 전작보다 더 난해하지만 그와 동시에 시네마틱함 또한 깊어졌다.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SF 클래식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는 모노리스가 등장한다. 거대한 석판처럼 생긴 외계인들의 물체인 모노리스는 인류사의 중간중간에 갑자기 등장하며 그들의 기술적인 발전을 가능케 만들고 중요한 분기점을 만들어낸다. 그라임즈의 스튜디오 앨범 디스코그래피가 흘러가는 모습은 어딘가 이런 식의 진화 서사를 보는 것도 같다. 가벼운 마음으로 <듄>에 대한 소위 “덕심”을 곳곳에 녹여낸 Geidi Primes에서는 지금 그라임즈의 음악과는 사뭇 다른, 약간은 아날로그적인 느낌이 풍겼다. 마치 기이한 문명을 지닌 원시 부족의 사운드트랙을 듣는 것 같았다.
그리고 같은 해 말 그녀가 발매한 두 번째 앨범인 Halfaxa는, 그런 기묘한 원시 부족이 모노리스를 만난 직후 진화한 모습처럼 느껴진다. 주술적인 분위기는 그대로 유지되고 있으나 첫 앨범에 비해서 일렉트로닉 사운드가 보다 풍부해진 것이 돋보인다. 첫 트랙 “Outer”의 뿅뿅 대는 전자음이나 “Weregild”의 신스음은 광활하면서도 신비로운 우주적인 공기를 가득 내뿜고 있다. 아름다우면서도 우리가 설명할 수 없는 거대한 규모의 공포, 이른바 코스믹 호러가 자리하고 있는 공간의 소리를 본따 노래하는 주술사들의 소음과도 같다. 우리는 마치 이를 탐험하는 모험가, 또는 그의 뒤를 포착하는 카메라 뒤나 스크린 앞에 관객과도 같다.
오르간 사운드와 계속해서 바쁘게 돌아가는 비트, 그리고 청아한 음색이 한 자리에 어우러진 “Sagrad Прекрасный”는 그라임즈를 인디 씬의 화제 인물로 등극하게 만든 Visions 앨범의 수록된 “Be a Body (侘寂)”, “Circumambient와” 같은 트랙들의 청사진을 엿보는 듯한 감상을 받게 한다. 다른 불친절한 트랙들과 비교했을 때 상대적으로 팝적인 느낌 덕에 싱글 단위로 존재감을 가장 강하게 내뿜는다. 웅웅대는 소리가 마치 극도로 진보된 광속 우주선의 조종석에서 흘러나오는 소음 같은 “Gradvandil”은 이러한 우주적인 풍경을 더욱 구체화한다.
동양적인 색채가 느껴지며 약간의 오리엔탈 팝 성향을 지닌 “Devon”이나 스트링 사운드가 이목을 끄는 “Dream Fortress”는 전반부 우주 항해와도 같던 전개와는 결이 달라 보이지만, 역으로 생각하면 이제 항해를 끝낸 주인공이 도착한 행성에서 펼쳐지는 풍경처럼 다가온다. 보컬이 다소 부각 되지만 여전히 그녀가 내뱉는 언어는 불분명하다. “World Princess”에서 이는 더 두드러진다. 세상을 일찍 떠난 고등학교 시절 친구를 그리는 다분히 개인적인 트랙에서 그라임즈는 그녀만의 장송곡과 함께 제사의식을 진행하는 것처럼 보인다. 알아듣기 힘든 발음으로 전달되는, 지나칠 정도로 반복적인 가사는 Geidi Primes처럼 원시적이면서도 오히려 이로 인해 더 미래적이다.
다만 앞부분이 조성한 이미지가 강한 탓에, 후반부의 흐름은 살짝 루즈해지기도 한다. 대체로 흐느적거리는 노래들이 즐비한 가운데 그나마 퍼커션 사운드가 강렬한 “Swan Song” 정도가 트랙 단위 존재감을 내세운다. 이의 뒤를 잇는, 쉴새 없이 “하아-” 거리는 오메가와 물결로 제목이 채워진 11번 트랙은 외계 식인종들이 먹이를 요리하기 전 거행하는 풍습을 청각화한 것 같아 듣다 보면 음험한 공포를 자아내기도 한다. “Hallways”의 쥐어 짜내는 전자음이 우리를 블랙홀 속으로 들여보내고 나면 여정을 마무리하는 “Favriel”은 다시금 중반부의 고대적인 사운드를 재현한다. 마치 영화의 결말 부분에 등장하는 플래시백을 마주하는 것과도 같다.
그라임즈가 의도한 것은 아니겠지만, Halfaxa에는 이런 식의 묘한 영화적인 기운이 깃들어 있다. 장르의 경계 없이 난해함을 잔뜩 머금고 미쳐 날뛰는 음악은 우리에게 자연스레 이러한 서사를 창조하게 한다. 랜덤하게 선택된 것 같은 단어들과 유달리 이상한 언어들이 트랙 타이틀을 잔뜩 수놓은 클레어 부셰의 두 번째 앨범은 이렇게 모노리스를 만난 그 직후의 순간처럼 그라임즈 디스코그래피에 있어서 과도기적인 면을 우리에게 들려준다. 디스토피아 세계 속의 기계문명인 Visions가 도래하기 전의 그 찰나가 담긴, 50분의 방대한 우주 사운드트랙이다.
(원 게시일: 20.06.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