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bum by Ellie Goulding
흐릿해져가는 싱어송라이터로서의 비전, 그리고 몰락해가는 팝스타로서의 위상을 깨고 그녀는 아티스트로서 짙푸른 발전을 이뤄냈다. 그동안의 기다림과 타협을 완전히는 아니어도 이해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정말로 엘리 굴딩의 커리어는 끝난 줄 알았다. 맥스 마틴, 그렉 커스틴과 같은 팝 프로듀서들의 손을 잡고 메인스트림으로 뛰어든 Delirium 앨범 캠페인은 흐지부지되어 끝나버렸고, 2018년 말 발매된 “Close to Me”부터 수많은 싱글이 연이어 발매되었으나 그 중 유효타를 거둔 것은 사실상 전무 했다. 복귀 계획은 전형적인 스트리밍과 차트를 겨냥한 얄팍한 싱글들로 낭비되었고, 그러면서도 차트에서 마땅한 흥행을 거두지는 못했다. 스스로는 본인 마음 가는 음악을 하는 것뿐이라 말했지만, 그녀가 은연중에 드러내듯 이 각종 콜라보레이션 프로젝트가 레이블의 압력에 의한 것임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작년 영국 차트 1위의 영광을 안겨준 “River”조차 조니 미첼과 똑같을 뿐인 커버곡이었으며 아마존과의 마케팅과 차트의 허점을 공략해 얻어낸 결과였을 뿐이다. 물론 19년 3월에 내놓은 진지한 피아노 발라드 “Flux”나 올해 5월에 공개한 환상적인 신스 팝 싱글 “Power” 같은 순간들이 있었으나 그것만으로 쉽게 희망을 가질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녀는 돌아왔다. 자본의 논리를 거스를 수는 없었는지 그녀는 결국 EG.0라는 두 번째 디스크에 차트 흥행용으로 참여한 싱글들을 몰아넣는 것으로 타협을 하긴 했으나, 그동안 꾸준히 언급했던 개인적인 이야기를 담아낸 음악은 Brightest Blue로 명명된 사이드 A에 온전히 실려있다. 지난 2년간의 행보로 얻어진 오명을 씻어내려는 듯이 엘리 굴딩은 세 곡의 인터루드 (“Cyan”, “Ode to Myself”, “Wine Drunk”)까지 수록하며 자신이 견고한 음반 단위 결과물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음을 열심히 보여주고 있는데, 다행히도 작품은 그 노력을 배반하지 않는다. Lights와 Halcyon에 참여한 프로듀서들을 대동하여 그녀가 들려주는 음악에는, 메인스트림에 머무르려고 발악하는 팝스타 엘리 굴딩이 아니라 섬세하면서도 감정적인 인간 엘레나 제인 굴딩이 드러나고 있다.
앨범은 세 인터루드를 통해 각각 네 개의 주제로 분할된다. 첫 파트를 이루고 있는 “Start”, “Power”, 그리고 “How Deep Is Too Deep”은 옛 연인을 향한 격분하는 감정을 담고 있으며, “Cyan”부터 “Ode to Myself” 사이의 두 트랙은 과거의 상처를 딛고 변화하며 발전하려는 그녀를 보여준다. 8-9번 트랙에서 엘리 굴딩이 내면의 목소리에 잠시 귀를 기울인다면, “Wine Drunk” 이후 등장하는 트랙들은 말 그대로 술에 취할 때 머릿속에서 차오르는 옛사랑의 기억을 보여주듯 여전히 그녀에게 남아있는 지나간 이들의 흔적을 파헤친다.
얼터너티브 R&B의 장르의 색채가 많이 들어간, 제목부터 “시작”인 첫 트랙 “Start”는 서서히 끓어오른다. 쓸쓸한 피아노 사운드가 곁들여진 채 그녀는 운율에 맞춰 노래하기보다 담담하게 말을 뱉어내나 그 뒤에는 숨길 수 없는 좌절과 분노, 슬픔의 격양된 감정이 뒤섞여있다. serpentwithfeet의 벌스와 함께 등장하는 스트링 사운드는 긴장을 한껏 고조시키고, “네가 날 가지고 놀았으니 이제는 전쟁의 시작이야”라고 하는 그녀의 선언 뒤에 이어지는 “Power”는 감정을 1차로 폭발시킨다. 묵직한 신스 베이스에 허스키한 보컬이 강조되는 “How Deep Is Too Deep”은 그녀의 배신감을 여과 없이 드러낸다. “내가 너무 깊이 들어간다며 날 꽉 붙잡았지. 너무 깊다는 게 대체 뭘 말하는 거야?” 간단하게 시작해 점차 복잡해지는 비트는 그녀가 노래할수록 그녀를 더 강하게 에워싸는 분노의 감정을 표현한다.
앨범의 첫 번째 하이라이트는 이 뒤에 등장한다. 그녀의 두 번째 앨범의 절반가량을 맡았던 프로듀서 짐 엘리엇이 참여한, 블루스/소울 적인 기타 선율로 가득 찬 “Love I’m Given”은 “하나의 거대하고 웅장한 송가처럼 들리며 음반의 첫 정점으로 자리한다. “과거의 일들은 바꿀 수 없겠지. 하지만 나는 바뀔 수 있어.” 지난날의 일들에 대한 후회에 발목 잡히기보다, 적극적으로 자신을 바꿔나가려는 의지로 가득 찬 그녀의 목소리에서는 강인함이 가득 흘러넘친다. 비교적 가라앉은 “New Heights”에서 엘리 굴딩은 한발 더 나아가, 연인 간의 사랑에 앞서 자신을 사랑하는 것의 중요성을 깨닫고 제목처럼 기존보다 높은 경지에 도달한다.
보컬에 초점을 맞추고 여성으로서의 자아를 성찰하는 “Woman”은 그녀의 디스코그래피에서 또 하나의 훌륭한 발라드 넘버로 자리하지만, 그 뒤를 잇는 “Tides”의 현저히 가벼워진 무게감은 A 사이드의 주 테마를 흐릿하게 만들어 버린다. EG.0 사이드 급의 인스턴트 느낌은 아니지만, 포지션이 애매한 탓에 앨범에 실리지 못한 “Sixteen”을 생각나게 한다. 다행스럽게도 뒤를 잇는, “내가 어떻게 널 지울 수 있겠어”라고 씁쓸하게 되뇌는 어쿠스틱 팝 트랙 “Bleach”와 고요함을 가득 머금은 채 어쩌면 가능했을 전 연인과의 미래를 상상하는 “Flux”는 흐트러질 뻔한 흐름을 재빠르게 수습한다.
그리고 음반의 두 번째 정점은 엔딩 트랙에서 만나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짐 엘리엇이 참여한 수려한 팝 발라드 Brightest Blue는 시퍼런 우울감으로 가득 찼던 음반을 가장 새파랗고 밝은 색채로 덧씌운다. 은은하게 뒤를 채우는 스트링 섹션과 가스펠 코러스에 받쳐지는 청명한 엘리 굴딩의 목소리에서는 평화와 희망이 담겨 있다. 가사는 겉으로 보면 지금 그녀의 남편이 된 연인 캐스퍼 조플링에 대한 기쁨을 노래하는 것으로 느껴지기도 하나, 엘리 굴딩이 부르짖는 이 행복은 삶의 수많은 순간들을 거쳐 그녀가 얻어낸 성찰이 안겨주는 것이고 그렇기에 노래는 더 찬란하게 이 여정을 마무리한다.
진솔한 메세지를 “진지한” 스타일로 소화해야 한다는 전통적인 관념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탓에, 프로덕션 측면에서 Brightest Blue는 일렉트로 팝에 기반을 두고 펼쳐졌던 기존 작만큼 흥미롭지는 못하다. 정서적으로 보다 후반부에 위치해야 할 “Love I’m Given”은 지나치게 빨리 등장하는 감이 있고, 대체로 발라드 위주로 흘러가는 탓에 지루함을 쉽게 느낄 여지도 크다. 하지만 트렌드를 따라가기에 급급했던 EG.0 사이드로 이미지가 얼룩졌던 것을 생각해 보면 그녀의 이런 비워내기는 다분히 의도적인 씻어내림으로 보인다. 물론 대중에게 기억될 엘리 굴딩은, 그녀의 차트 히트곡 중 대부분이 싱어송라이터로서의 역량을 온전하게 드러내지 못하는 커버 곡이거나 외부 작곡가에게서 받은 팝 트랙인 것 처럼 적당한 커버 뮤지션 또는 대형 댄스 팝스타일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네 번째 앨범 Brightest Blue는 그럼에도 숨길 수 없는 아티스트로서의 능력이 그 안에 늘 존재해 왔고, 또한 계속해서 성장해나갈 것임을 우리에게 약속하는 작품이다.
(원 게시일: 20.07.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