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by Carly Rae Jepsen
본편보다는 상대적으로 가벼운 호흡과 볼륨 속에 담아내는 로맨스의 다양한 에피소드들. 그렇지만 음악의 수준만큼은 결코 가볍지 않다.
앨범에 최종적으로 실리지 못하고 탈락한 곡들을 듣고 싶은 팬들은 장르를 막론하고 존재한다. 뮤지션들이 이런 수요를 의식하고 행하는 전략은 대체로 두 가지로 나눌 수 있겠다. 옛날에는 싱글 B 사이드가 보편적으로 존재했으니 자신들의 긴 커리어를 정리하는 컴필레이션 앨범에 이런 노래들을 수록하거나, 음반의 발매 몇 주년 기념이니 해서 발매하는 리이슈 반에 아웃테이크를 넣거나. 하지만 칼리 레이 젭슨은 굳이 그러지 않았다. 스트리밍 덕분에 그런 상술 없이도 팬들과 한층 더 직접 연결될 수 있었으니까. 그녀는 2015년 발매한 컬트 클래식 E•MO•TION 앨범 세션의 200여 곡 중 탈락한 곡들을 다시 한번 추리고 추려, E•MO•TION: Side B라는 이름의 1주년 기념 EP를 공개했다. 그리고 이 깜짝 발매한 EP는 세상에, 전혀 버려질 곡들이 아니었다.
일부 트랙을 제외하면 대체로 행복하고 소위 말해 순애적인 로맨스의 순간을 담아냈던 본판과는 사뭇 다르게, 이 아웃테이크 모음집에서 칼리 레이 젭슨은 연애 관계 속에서 등장하는 보다 다양한 감정을 포착한다. 정직한 로맨스를 다루고 있는 트랙은 “Higher”와 “Body Language” 정도로 음반의 1/4 정도뿐이다. (일본 반에 실린 “Cut to the Feeling”을 포함해도 1/3이다) 애끓는 짝사랑을 부르짖던 A 사이드의 “Your Type”과 정반대로 “The One”에서 그녀는 자신을 향한 상대방의 감정을 앙칼지게 거부한다. “네가 원한다면 하룻밤을 같이 해줄 수는 있어. 하지만 그렇다고 네 반쪽이 되긴 싫은걸.” 사랑이라는 단어를 직접 사용하진 않았으나 그 정서가 절절히 녹아있던 A 사이드와 달리 이 B 사이드는 그 감정을 비교적 가볍게, 스냅샷 찍듯이 다룬다.
이러한 달라진 접근 방식이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은 아무래도 “Store”다. 칼리 레이 젭슨은 이 노래에서 연인에게 이별을 고하지만 그 방식은 상당히 우회적이다. 차분한 벌스와 대비되는, 조금은 뜬금없이 명랑한 코러스에서 그녀는 “난 그냥 뭐 좀 사러 갈게” 하는 식으로 관계의 끝을 돌려 말한다. 겉으로는 엉뚱하게 들리지만 “이별에 능숙하지는 못한” 가사 속 캐릭터와 음악의 구조가 그대로 일치한다. 앨범의 오프너인 “First Time”도 비슷하다. AM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듯한 인트로가 이목을 끄는 이 곡은 매번 처음 같은 이별의 아픔을 진득하기보다는 손쉽고 가볍게 노래한다. 업 템포 비트와 장난기 어린 보컬 덕분에 노래는 첫 사랑의 기쁨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데브 하인즈와 함께 만든 “Body Language”도 몸을 들썩이게 하는 좋은 곡이지만, 진정한 하이라이트는 오히려 칼리 레이 젭슨이 작곡에 참여하지 않은 “Higher”다. 똑같이 그렉 커스틴이 작곡에 참여한 엘리 굴딩의 “Something in the Way You Move”를 떠오르게 하는 이 환상적인 퓨어 팝 댄스 앤썸은 말 그대로 어느 하나 흠잡을 곳이 없다. 기분 좋은 연인의 사랑을 담아낸 가사 속 “High, high, higher-” 하는 간결하면서 중독적인 훅과 빈틈없이 채워진 신디사이저의 시원한 음색, 뛰어난 칼리 레이 젭슨의 보컬 소화력이 한데 뭉쳐 환상적인 결과물을 빚어내고 있다. 군더더기 없이 명료하고 직관적이기에 그 매력이 크게 발휘된다. 교과서적으로 만들어진 팝의 힘이 얼마나 클 수 있는지를 제대로 보여주는 예시다.
슬픈 정서를 비틀림 없이 그대로 내뿜는 트랙들도 결코 이에 지지 않는다. “Fever”의 담담하게 타오르는 감정은 가히 위력적이다. 자전거를 훔쳤음에도 아무 반응 하지 않고, 심지어 불을 꺼둔 채 집을 비운 연인을 보며 그녀는 체념한다. 잠시 마음을 가다듬은 듯이 짧은 침묵 이후 터져 나오는 후렴의 뜨거운 공기는 리스너를 압도한다. “너 내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구나, 좋아.” 하고 툭툭 내뱉는 칼리 레이 젭슨의 떨리는 목소리는 가사에서 그녀가 앓고 있는 사랑의 열병을 우리에게 생생하게 전달한다. “내 불빛은 깨어있지만, 너의 도시는 잠들어 있어. 참 다른 세상이네. 네가 내 곁에 없으니. 계속 내 마음을 아프게 해, 다 좋아.” 문장 한줄 한줄의 울림마저 크다.
비슷하게 침착한 어조로, 간단하고 차분한 퍼커션에 맞춰 감정 없이 얼음처럼 차가운 남자를 노래하는 “Cry”의 80년대 미드 템포 팝 분위기도 인상적이다. 건조하게 시작했다가 점차 구슬퍼지는 보컬의 점진적인 변화가 간결하면서도 강렬한 후렴과 훌륭한 시너지를 발휘하며, 깊은 곳에 머금은 아련함을 가득 내뿜는다. 적극적인 복고풍 신디사이저 운용이 돋보이는 다른 트랙들과는 다소 다르지만, 비교적 심플한 프로덕션의 “Roses”는 그래서 더 적절한 엔딩 트랙이다. 끝을 향해가는 연인관계에 대한 은유로 모든 장미가 까맣게 변해간다는 표현이 탁월하다. 보컬에 초점이 실린 가운데 애절하게 “제발 날 떠나지 말아줘”라고 노래를 마무리하는 보컬의 호소력도 한몫한다.
E•MO•TION 앨범과는 분명히 결이 다르기에 이 여덟 개의 트랙이 앨범의 최종 트랙리스트에서 탈락한 것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하지만 사랑의 감정을 추상적으로 내버려 둔 채 낭만적으로 그려내려 했던 Side A와 대비되는, 소박하면서도 알찬 디테일로 복합적인 로맨스의 순간을 풀어내는 Side B만의 방식도 그 못지않게 매력적이다. 이렇게 음반은 값진 팬서비스인 동시에 뛰어난 팝 작곡가로서의 칼리 레이 젭슨의 역량을 적극적으로 뽐내는 무대가 된다. 다른 아티스트들이 초호화 A&R 팀의 지원을 등에 업고 온갖 기를 써야 겨우 만들 수 있을 것 같은 팝을 본인 주도하에 이뤄진 팀과 함께 손쉽게 만들어내는 그녀를 보면, 이에 대해 천부적인 재능이라고 드높여도 큰 문제가 없어 보인다.
(원 게시일: 20.08.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