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MO•TION

album by Carly Rae Jepsen

by 감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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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멜로디 속에 세세하게 담아낸 당신과 나의 감정. 세상에 나온 지 5년이 지났음에도 음반은 여전히 기억될 2010년대의 훌륭한 팝 클래식으로 공고하게 자리한다.

그렇게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지는 못했지만, 2015년도 팝 분야에서 가장 큰 반전을 보여준 인물 중 하나가 칼리 레이 젭슨이라고 해도 이견을 가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전 세계를 휩쓸었던 메가 히트 싱글 “Call Me Maybe”, 그리고 Hot 100 차트의 탑텐을 기록한 아울 시티와의 콜라보레이션 “Good Time”으로 그녀는 뻔하게 차세대 틴 팝 스타의 자리에 등극할 인물로 보였다. 그러나 어중간하게 그런 가벼운 이미지를 따라가려고만 한 느낌이었던 Kiss 앨범과 이후 다른 싱글들의 부진으로 칼리 레이 젭슨은 재빠르게 잊히는 것 같았고, 3년 만의 복귀 앨범의 첫 싱글이 모습을 드러냈을 때까지만 해도 그녀의 몰락은 당연한 일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녀는 우리를 비웃기라도 하는 듯이 80년대 느낌이 물씬 풍기는 발라드 “All That”을 선보이며 대중의 인식 속에 감춰졌던 자신의 역량을 보여주었고, 이후 공개한 “Run Away with Me”로 커리어를 완전히 재부팅 성공시키는 데에 성공했다. 대중적인 반응은 미미했으나 그 대신 평단을 사로잡으며 칼리 레이 젭슨은 장르로서의 “팝”을 완벽히 구현해내는 인디 컬트 여신, 그리고 언더독 팝 프린세스의 자리에 등극했다. 모두의 우려와 달리 그녀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원 히트 원더 따위의 가수가 결코 아니었다.


“감정”이라는 제목처럼 E•MO•TION이 지닌 가장 큰 강점은 바로 보편성이다. “Call Me Maybe”는 뛰어난 멜로디의 힘도 있었지만, 또 다른 히트 요인은 만인이 쉽게 공감할 수 있었던 달콤한 감성이기도 했다. 세 번째 앨범에서도 그녀는 마치 로맨스 소설이나 드라마의 친숙한 여주인공처럼 자리한 채, 우리의 마음 한구석에서 공감을 끌어낸다. 2010년대 가장 중요한 팝 싱글로 꼽히는 “Dancing on My Own”의 주인공 로빈(Robyn)을 연상시키는 미드 템포 트랙 “Your Type”의 절절함을 보자. “너에게 난 그냥 친구라는 걸 알아. 널 내 거라고 부를 수는 없겠지. / 네가 날 생각한다 해도, 너에게 난 그저 머릿속 깜빡이는 존재 정도일 거야.” 당신이 이 노래에 조금도 감정 이입을 할 수 없다면, 짝사랑을 해보지 않은 사람이거나 감수성이 턱없이 낮거나 둘 중 하나일 테다.


우리를 그렇게 보편적인 로맨스의 영역으로 이끌면서 동시에 앨범은 Kiss 시절보다 확연히 성숙해진 칼리 레이 젭슨의 정서를 각인시킨다. 그리고 그녀가 내비치고자 하는 다양한 사랑의 감정들은, 노랫말뿐 아니라 사운드 자체로도 탁월하게 전달된다. 연인의 사랑에 녹아내리듯 자신의 내면을 술술 말해버린다는 “Warm Blood”는 뱀파이어 위켄드의 (전) 멤버 로스탐 바트망글리와의 협업으로 일궈낸 심장 박동이 형상화된 신디사이저 비트가 돋보이고, 시아와 3인조 밴드 하임이 작곡에 참여한 “Making the Most of the Night”은 벌스에서부터 차근차근 쌓아 올린 긴장감을 박진감 있게 터트리는 후렴과 다가가 널 낚아채겠다는 다짐 어린 가사가 맞물려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절도 있는 건반 사운드가 주축이 되는 하우스 장르의 디럭스 트랙 “I Didn’t Just Come Here to Dance”에서는 세세한 감성 대신에 시크하게 한 발짝 다가서는 카리스마까지도 느껴진다. “Gimmie Love” 또한 기본적으로는 가사의 반복이 우선되긴 하나, 로맨틱한 느낌을 물씬 풍기는 몽롱한 사운드가 아니었다면 그녀가 사랑을 갈구하고 있음이 이렇게 와닿진 않았을 것이다.


진지함과 함께 무게감은 늘어났으나 E•MO•TION은 가벼운 로맨스가 가지는 즐거움을 잃지 않았다. 골치 아픈 남자친구와 직언을 날리는 절친 사이에서 고민하는 디스코 팝 “Boy Problems”와 통통 튀는 타이틀 트랙 “E•MO•TION”, 먼 길을 돌아가는 지금을 즐기자는 “Let’s Get Lost” 등에서 유치하지 않으면서도 풋풋한 칼리 레이 젭슨의 감성을 여전히 느낄 수 있다. 훵키한 비트와 함께 발랄하게 앨범을 마무리 짓는 엔딩 트랙 “When I Needed You” 또한 빼놓을 수가 없겠다. 장난스러운 멜로디가 매력을 발하는 가운데 차분하게 마무리되나 싶었던 후반부 전개를 뒤엎으며 흔한 팝 음반의 클리셰에서 살짝 벗어나려는 시도가 느껴진다. 처음 듣기에는 지나치게 전작을 의식했던 것 같았던 “I Really Like You”도 앨범 내에서 듣다 보면, 한층 깊어진 복고풍의 비트 속에서 앨범이 나아가고자 하는 80년대 신스팝의 방향성을 느낄 수 있다.


흠결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LA Hallucinations”는 약간의 글리치 요소도 섞인 강한 일렉트로닉 사운드에 맞춰서 LA라는 도시가 가져온 유명인의 삶이 주는 스트레스를 담아낸다. 물론 중심 주제는 옛날의 그 소박한 시절의 연인관계에 대한 그리움이지만, 가사의 방점이 살짝 빗겨나간 탓에 곡 단위로는 괜찮아도 앨범의 전체적인 흐름에서는 사뭇 어긋난 느낌을 내기도 한다. 미니멀한 프로덕션의 “Black Heart”는 아쉽게도 스쳐 지나갈 만한 트랙으로 음반의 유일한 약점이 된다. 다행히 마지막 디럭스 트랙인 “Favourite Colour”는 무난한 파워 발라드 트랙으로 약간의 진부한 엔딩 트랙 답지만, 그래도 대체로 팝 앨범에 흔히 하나씩은 실릴 법한 그 느낌이 또 매력이다. 오히려 타겟 버전 및 일본 버전에만 추가로 수록된 미드 템포 신스 발라드 “Never Get to Hold You”와 낭만적인 일본 순정 애니메이션의 사운드트랙 같은 “Love Again”이 숨은 보석으로 가지는 힘이 더 크다. E•MO•TION을 완전히 맛보고 싶다면 꼭 확인해봐야 할 트랙들이다. (*다행히도 5주년을 맞아 두 트랙의 음원 서비스를 개시했다)


음반의 주인공인 칼리 레이 젭슨은 독창적이고 확고한 캐릭터를 지니는 인물은 아니기에 스타덤에 오르기 적합한 인물은 아니지만, 이로 인해 역설적으로 그녀가 만든 세 번째 스튜디오 앨범은 이상적인 팝 음반으로 존재한다. 이 세상에서 누군가 한 명 정도는 너의 로맨스, 나의 로맨스 이야기가 담긴 이런 음악을 응당 해줘야 하고, 그녀는 우리가 일상 속에서 만드는 상상 속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주인공이 되어 이를 완성해냈다. 그리고 그녀가 쓴 가사와 멜로디 속에는 그저 자기 자신뿐 아니라 팝을 즐기는 대중이 투영되어 있다. 철저한 보편성이 빚어낸 특별함이라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어쩌면 이것이 팝 음악의 본질이다. 팝의 기본 문법을 착실하게 따르면서 이러한 이상향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E•MO•TION은 그렇기에 2010년대 등장했던 수많은 “팝” 앨범들 사이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이 될 수밖에 없다.


(원 게시일: 20.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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