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sions

album by Grimes

by 감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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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트리올의 DIY 뮤지션에서 인디 음악계의 선두주자로. 음반은 그녀만의 공포스럽고 광활한 우주가 탄생한 빅뱅의 순간을 담아낸다.

고통의 시간은 종종 뮤지션에게 있어 역작을 만드는 자양분이 된다. 신흥 셀러브리티 문화의 공격 대상이 되어버린 에이미 와인하우스의 Back to Black이 그랬고, 다리 수술과 록스타의 삶에 찌든 위저의 프론트맨 리버스 쿼모의 Pinkerton이 그랬다. 그리고 투어 생활에 지친 클레어 부셰는 스스로 어둠의 시간을 받아들였다. 그녀는 3주간 몬트리올의 아파트 방에 자기 자신을 가두고 종종 암페타민의 도움을 빌린 채, 그리고 심지어 때로는 모든 빛을 차단한 채 룸메이트가 넣어준 식사로 연명하며 앨범을 제작했다. 이 과정 속 폭발하는 창의력을 그녀는 다른 누구의 도움 없이 오롯이 본인의 손에서 그대로 음악에 담아냈고, 그렇게 세상에 등장한 Visions는 그녀를 인디 씬의 혜성 자리에 앉혔다.


모호하긴 하지만, 그래도 음반은 그녀의 전작과 비교하면 확실히 직관적이다. 앨범의 표제작이라 할 수 있는 “Genesis”와 “Oblivion”이 특히 그렇다. d’Eon과 함께한 Darkbloom의 “Vanessa”에서 보여준 그녀만의 팝의 초석 위에 세워진 “Genesis”는 오밀조밀한 신스 비트에 몽환적인 공기를 가득 불어 넣는다. 문장과 챈트 사이에 애매하게 걸친 가사를 내뱉는 클레어 부셰의 목소리가 지닌 청아한 음색은 기존에는 알아차리기 어려웠던 그녀의 보컬 능력에 주목하게 만든다. 울렁이는 신스 베이스가 돋보이는 “Oblivion”은 보다 팝의 구조에 가까운 트랙이다. 낮게 울리는 리프와 대비되는 하늘 높이 치솟는듯한 목소리로, 그라임즈는 성폭력이 그녀에게 남긴 상흔을 토해낸다. 혼자 밤길을 걷지 않는다는 고백은 마지막에 “어두운 밤에 만나요”라는 기다림으로 이어지고, 망각이라는 의미의 제목과는 반대로 그녀는 공포의 근원을 덮어두지 않고 마주하기를 선포한다.


나머지 트랙들은 일반적인 팝의 구조를 따르지 않는 탓에 개별적으로 저 두 트랙만큼의 큰 인상을 남기는 것은 아니나, 그럼에도 한정적인 작업 툴의 한계를 깨고 프로덕션에 있어서 진일보한 결과물을 보여준다. 오프닝 트랙인 “Infinite ♥ Without Fulfillment”는 둥둥거리는 비트 위에 불규칙하게 들어가는, 상반되는 높낮이로 양분되는 그라임즈의 보컬이 정교한 합을 이뤄낸다. “Circumambient”와 “Symphonia IX (My Wait Is U)”의 비트는 마치 태양계 너머를 탐사하는 우주선이 내뿜는 전자파처럼 들리며 큰 규모는 아님에도 소박하게 우주적인 이미지를 내뿜는다. 현란한 피아노 노트가 수놓아진 두 트랙 “Vowels = Space and Time”과 “Be a Body (侘寂)”의 리프는 상당히 중독적이기도 하다. 드림팝의 느낌이 풍기는 “Visiting Statue”와 아웃트로 “Know the Way”에 절묘하게 덧입혀진 오리엔탈 팝의 색채는 불친절한 모호함으로 2분대의 짧은 러닝타임에도 노래를 확실하게 각인시킨다.


그라임즈의 최대 강점이라 할 수 있는 경계를 가르지 않는 소스의 채용과 다양한 아이디어의 구현은 앨범에서 더욱 돋보인다. “Colour of Moonlight (Antiochus)”는 프린스의 “When Doves Cry”에서 빌려온 둔탁한 비트의 사용이 절묘하고, 22세기 지하 도시의 클럽에서 흘러나올 음악처럼 들리는 “Nightmusic”은 앨범에서 가장 댄스 트랙에 가까운 곡이면서도 인트로/아웃트로에서 샘플링한 페르골레시의 “Stabat Mater”와 노래 곳곳에 들어간 백워드 마스킹 보컬 등의 범상치 않은 요소로 장식되어 있다. 음반에서 가장 난해한 축에 속하는 “Eight”은 <트랜스포머> 시리즈의 악역들인 디셉티콘들의 음성처럼 들리는 사운드로 꽉 차 있기도 하다. 그리고 미니멀한 프로덕션의 “Skin”(뿐 만 아니라 앨범 전체)에서의 그라임즈의 찌르는 고음은 그녀가 좋아하는 아티스트로 직접 언급한 머라이어 캐리의 보컬 스타일을 본인만의 방식으로 본뜬 결과물이라 할 수 있겠다.


Visions는 처음 들었을 때 바로 그 진가를 알아차리기 쉬운 앨범은 아니다. 대부분이 음침하고 우울한 정서를 공유하는 데다, 보컬은 가사의 전달에 치중하는 대신 시종일관 흐느끼면서 높은 고음을 쥐어짜고 있다. 게다가 확실한 훅이 없는 탓에 정형화된 구조에 익숙한 많은 이들에게는 처음 들으면 다 그 노래가 그 노래처럼 들릴 수밖에 없다. 실제로 클레어 부셰 본인마저 이 앨범을 두고, 즉각적이고 단편적인 아이디어로 곡을 빨리 완성 시켜야 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필러 트랙으로 가득 차 있다고 평가한 바 있다. 물론 자신의 작업물이기 때문에 더 엄격한 말이 나올 수밖에 없겠지만 근원적으로 크게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럼에도 자신이 가진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가감 없이 그대로 불어 넣으며, 전작보다 훨씬 더 직관적이고 몰입하게 만드는 음악을 선보인 Visions는 그라임즈의 디스코그래피에서 확연한 진화의 순간으로 우뚝 선다. 당신이 강령술이 깃든 기이한 몸짓의 댄스 플로어를 꿈꾸든, 로봇에게 점령당한 미래 기계 사회를 그리든, 아니면 머릿속에서 저 멀리 우주를 유영하고 있든지 간에 앨범은 모두 합당한 사운드트랙이 된다. 그리고 그녀의 이런 역작은 여전히도, 오롯이 그녀의 두 손에서 탄생했다. 기존과 똑같이 개러지밴드라는 소프트웨어만을 가지고 만든 열세 곡의 작곡가 명단에는 클레어 부셰의 이름만이 적혀있다. 거대한 세계가 종종 조그만 지점에서 탄생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러니 이 음반에 대해 “비범하다”는 수식어를 굳이 아껴서 사용해야 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원 게시일: 20.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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