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bum by Grimes
허물을 벗고 거대하고 아름다운 날개를 펼치다. 이견의 여지 없는 커리어의 정점이자, 자유가 핵심 가치로 등극한 21세기 문화와 음악 산업을 상징하는 음반이다.
“캘리포니아, 넌 내가 슬퍼 보일 때만 날 좋아했지.” “California”에서 그라임즈는 이렇게 노래한다. Visions라는 앨범으로 인디 씬의 스타로 떠오른 클레어 부셰는 힙스터들과 평론가들에게 확실한 눈도장을 찍었고, 그들은 그녀를 자신들의 새로운 뮤즈로 삼았으나 동시에 메인스트림 문화를 향유하며 팝 음악 또한 즐기는 클레어 부셰의 존재를 부정하고 자신들의 틀 속에 가둬버렸다. 우울하고 어두운 감성에 젖은 기묘한 일렉트로닉 뮤지션으로 말이다. 그리고 그녀는 반격의 칼을 빼 들었다. Art Angels는 그 편협한 “전문가”들에 대한 그라임즈의 신랄하면서도 미워할 수 없는 매력적인 트롤링이자, 그녀가 늘 꿈꿔오던 팝스타를 향한 거창한 도약이다.
개러지밴드만으로 제작했던 전작들이 명확한 멜로디보다는 반복적인 루프가 만들어내는 모호한 분위기의 위에서 펼쳐졌다면, 더 풍부한 사운드를 위해 에이블톤 라이브를 사용한 Art Angels에는 팝의 작법이 전면에 걸쳐 쓰이고 있다. 인트로인 “laughing and not being normal”이나 래퍼 Aristophanes가 참여한 “SCREAM”, 그리고 “Life in the Vivid Dream” 같은 인터루드를 제외하면 나머지 트랙은 벌스-후렴으로 구성되는 팝의 문법을 착실히 따른다. 그리고 이러한 대대적인 변화는 그라임즈의 가려져 있던 훌륭한 멜로디 메이킹 능력을 전격적으로 드러낸다.
이것이 제일 잘 드러나는 것은 앨범에서 가장 먼저 공개되었던 싱글 “Flesh Without Blood”다. 지글거리는 팝 펑크 스타일 기타 톤은 후렴이 가진 중독성을 가득 증폭시키고, 직관적인 멜로디 라인은 그전 그녀의 음악에서는 결코 기대할 수 없었던 떼창을 자연스레 유도한다. 정말 “베드룸 팝” 같았던 그전 음악들과는 달리, 스타디움 공연장에서 울려 퍼져도 전혀 어색함이 없을 만한 곡이다. 그런가 하면 자넬 모네가 피쳐링한 “Venus Fly”는 이렇게 확장된 공간을 거센 아우라로 가득 채운다. 날카로운 랩-싱잉 보컬과 사납게 두들기는 신스 비트, 곳곳에 가미된 바이올린 등 상당히 다채로운 소리 복합적으로 모여있다. 자칫하면 산만하게 들릴 수도 있으나, 일말의 그런 느낌 없이 세련되게 완성되어 노래는 화려한 모델들이 오가는 하이 패션 런웨이 무대의 풍경을 제시한다.
공간적인 규모만큼이나 공격성 또한 커졌다. 많은 이들에게서 음반의 하이라이트로 꼽히는, 폭주족의 쏜살같은 질주 그 자체와도 같은 “Kill V. Maim”은 그라임즈의 디스코그래피에서 단연코 돋보이는 폭발적인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 몸을 들썩이게 하는 공격적인 신디사이저 리프에 맞춰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그녀의 보컬이 발산하는 기운은 말초적으로 짜릿한 쾌락과 희열의 단계로 우리의 정신을 몰고 간다. 마치 피를 토해내듯 기괴하게 솟구치는 “SCREAM”은 시종일관 귀를 자극하는 그라임즈의 괴성과 그 위에 얹어진 아리스토파네스의 중국어 랩이 마치 기관총처럼 발사되며 슬래셔 무비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만든다.
이렇게 강렬한 이미지를 내세우는 트랙들이 프로덕션 면에서 강점을 보인다면, 다소 부드러운 톤을 지닌 트랙들은 보컬리스트로서의 그녀의 역량을 부각한다. “California”에서 그라임즈는 그동안 주되게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자신의 뚜렷한 강점으로 존재감을 뽐내던 본인의 가녀린 음색을 최대로 활용한다. 촉촉한 사운드가 노래를 아름답게 장식한 채 그 속에 어느 때보다 집중된 그녀의 목소리는 그전처럼 단순히 사운드 제작의 장치가 아니라 노래를 이끌고 가는 핵심 요소로 자리한다. 훅의 멜로디가 돋보이는 “Pin”에서는 청량한 음색으로, 뿅뿅거리는 신스 리프와 함께 하늘 높이 치솟는 “World Princess, Pt. II”와 같은 트랙들에서는 동화 속의 요정 같은 찌를 듯한 고음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식의 탁월한 운용이 돋보인다.
음악의 형식은 팝의 영역에 몸담고 있지만, 그럼에도 그라임즈는 전형적인 팝의 테마인 로맨스에 종속되지 않은 채 다양한 소재를 풀어나간다. 그녀는 자신의 열렬한 지지자였던 (피치포크를 중심으로 한) 인디 평론계를 거침없이 비꼬면서 공격하기도 하고 (“California”), 여성 뮤지션으로서 필연적으로 마주할 수밖에 없는 대상화에 대한 쓴소리를 늘어놓기도 하며 (“Venus Fly”), 자신을 여성이라는 존재로 평가절하하던 이들을 비웃다가도 (“World Princess, Pt. II”), 영화 <대부 2>에서 알 파치노가 맡은 돈 마이클 콜레오네에게 다른 성별로 변신하는 뱀파이어라는 독특한 설정을 덧입힌 채 그의 관점으로 노래하기도 한다. (“KIll V. Maim”)
물론 이렇게 거침없는 표현과 상상력이 날뛰는 반면에 다소 얌전해서 아쉬운 트랙들도 있다. “Belly of the Beat”와 (그라임즈 본인이 가장 안 좋아한다고 말한) “Easily”는 밋밋한 훅과 더불어 전체적으로 특색 없는 평탄한 곡에 머무르고 만다. 가장 큰 실책은 앨범 전에 데모로 먼저 공개했던 “REALiTi”이다. 멜로디는 기존의 것 그대로이지만 음반의 전체적인 색채를 따라가기 위해 과도하게 덧칠한 프로덕션이 데모 버전의 몽환적인 분위기를 다소 헤쳐버리고 말았다. 물론 피지컬 버전에서 이 데모곡을 만날 수 있기야 하지만, 보너스 트랙으로만 수록하기에는 이 손대지 않은 간결함이 가지는 매력이 훨씬 컸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어쩌면 이러한 변화가 Art Angels라는 작품의 본질과 취지를 잘 표현해주는 순간으로 보이기도 한다. 자신의 고향이자 커리어의 시작이었던 몬트리올에 대한 사랑을 부르짖는 신나고 펑키한 타이틀 트랙을 한번 들여다보자. “내가 사랑하는 것은 곧 내가 행하는 것이 되지”라고 노래하듯이, 그녀는 타인의 평가에 개의치 않고 자신이 가진 뚜렷한 신념에 의존해 음악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런 그녀에게 소위 말하는 “전문가”들의 비판은 아마 의미 없는 것일 테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 자신이 좋아하는 장르 속에 “몬트리올, 내 맘을 아프게 하지 말아줘”라고 하는 클레어 부셰의 목소리는 마치 자유를 누리듯이 신나면서도 동시에 감정적으로 들린다.
그리고 이러한 정서는 앨범의 엔딩 트랙인 “Butterfly”로도 이어진다. 우리가 그녀를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든 그라임즈는 그 틀에 박힌 존재가 되기를 온몸으로 거부한다. “왜 하모니를 애써 찾는 거야? 하모니는 어디에나 있어.” 본인의 말대로 뮤지션 그라임즈의 매력은 단순히 어둡고 우울한 음악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팝이란 장르는 그녀에게 있어 도피나 타협이 아닌 진화였다. “세상을 회전시키는 것은 나비의 날개짓이야.” 음악적인 해방과 함께 그라임즈는 다시 한번 성장했다. 단순히 인디 씬의 혜성을 넘어, 메인스트림과 인디를 나누는 굳건한 장벽이 허물어진 21세기 음악을 상징하는 인물로 말이다. 그리고 그녀는 철저히 자기 자신의 지휘하에 이것을 해냈다. “만약 네가 드림 걸을 찾고 있다면, 난 그 드림 걸은 되지 않을 거야.” 이 외침을 마지막으로 그라임즈는 한 마리의 나비가 되어 날아간다.
(원 게시일: 20.1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