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bum by Katy Perry
상업 가수로서의 시작을 알리는 상큼한 첫 번째 발걸음. 무시할 수 없는 단점들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으나, 그럼에도 음반이 가져다주는 즐거움 하나만큼은 확실하다.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가 볼까. 내 음악 인생에 있어서 일말의 여지없이 가장 중요한 해인 2013년으로. 중학교 2학년이 된 나는 학기 초 학교 동아리를 계기로 아델과 에이미 와인하우스의 음악을 들으며 팝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당시 활발하게 활동하던 네이버 팝 블로거들에게서 영향을 받아 레이디 가가를 주축으로 한 당시 (솔로 여성 뮤지션 위주의) 메인스트림 팝을 본격적으로 듣기 시작했다. 내가 케이티 페리를 알게 된 것도 그때였다. 몇년 앞서 Teenage Dream으로 미국 빌보드 Hot 100 차트를 휩쓸었던 그녀는 이때 세 번째 앨범인 Prism으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었고, 당시 내 1순위 아티스트였던 레이디 가가를 모든 상업적인 면에서 압도하기까지 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처음에는 이런 경쟁 구도로 인해 마냥 고깝지만은 않았던 것이 사실이나, 화려한 뮤직비디오와 캐치한 싱글들을 통해 그녀의 매력을 느끼게 된 나는 앨범 단위로는 별로 좋지 못한 소리를 듣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그녀의 음반을 모으기로 결심했다.
당시 국내에서 한창 판매 중이던 세 번째 앨범과 달리 그녀의 첫 앨범 두 장은 국내에서 재고를 거의 찾아보기 힘든 상황이었다. 그래도 어찌어찌 해외 구매대행 사이트에서 구입처를 발견한 나는 바로 앨범을 주문했고, 점차 날이 추워지던 2013년 말 두 번째 앨범과 함께 그녀의 첫 작품 One of the Boys를 받아들었다. 싱글로는 훌륭해도 앨범 단위로는 엉망이라는 평가를 받는 소포모어작은 내가 듣기에도 정말 그랬지만, 데뷔 작품이 그와 비슷하게 나쁜 평을 받았다는 사실은 당시 나에게는 이해하기 좀 힘들었다. 그렇게 트랙들이 중구난방도 아니고, 대체로 비슷한 분위기에 거의 다 괜찮게 들을 만한 음악들인데 왜 이리 평가가 박한 거지? 그런 의문을 뒤로 한 채 나는 이 앨범을 한창 즐겨 들었고, 사실상 통으로 돌린 적이 한 자릿수에 그치는 Teenage Dream과 달리 One of the Boys는 종종 전곡을 재생했다.
이 앨범에 대한 내 향수는 이렇게 두 문단이나 쓸 정도로 강하고, 그래서 나는 이 작품에 대해 여전히 까다로운 평가를 내리지는 못하겠다. 물론 노래들에 담긴 유치한 가사 내용과 엉성한 표현들을 이해하고, 동시대 타 뮤지션들의 음악에 대해서도 대략적으로나마 알고 있는 지금 시점에서 잘 만들었다고 하기는 민망한 구석이 있다. 가사는 대체로 진지한 고민 없이 만든 하이틴 영화나 드라마의 플롯을 요약하는 느낌이고, 일부 심한 곡들은 젠더 스테레오 타입에 심하게 의존하기도 한다. 게다가 장르적으로는 (90년대 앨라니스 모리셋의 뒤를 이은) 에이브릴 라빈이라는 뮤지션이 빚어낸 00년대 여성 팝-록 음악의 트렌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면서, 그녀를 포함해 켈리 클락슨이나 핑크와 같은 선례들에 비해 감정적인 깊이는 거의 없다시피 하다.
하지만 이런 단점을 충분히 극복할 수 있을 정도로 캐치한 멜로디가 주는 직관적인 매력이 상당히 크다. “Ur So Gay” 정도를 제외하면, 기억에 깊게 남지 않는 경우는 있다 하더라도 들어주기 힘들어 뛰어넘고 싶은 트랙은 찾아보기 힘들다. 히트 메이커 프로듀서들의 도움에 힘입어 미국 싱글 차트에서 7주간 정상을 지켰던 “I Kissed a Girl”이나 월드와이드로 높은 판매고를 기록한 (그리고 지금은 뮤직비디오가 10억 조회수를 기록한) “Hot N Cold”, 그리고 네 번째 싱글이면서도 탑텐에 오른 “Waking Up in Vegas”와 같은 싱글들의 듣자마자 귀에 바로 꽂혀버리는 훅은 굳이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레즈비언적인 경험을 단순히 일탈로 치부하는, 과연 진보적인 것인지 보수적인 것인지 알 수 없는 태도와 변덕 부리는 애인을 계집애 같다 칭하는 표현이 일부 걸리기는 하나 노래가 지닌 강력한 훅은 이런 가사의 장벽을 손쉽게 뚫고 들어온다.
One of the Boys가 케이티 페리의 커리어 전성기인 Teenage Dream과 비교했을 때 음반 단위로 더 괜찮은 작품이라 감히 더 말할 수 있는 것은, 이런 존재감 강한 히트 싱글들 외에도 다른 트랙들이 탄탄히 받쳐주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뚜두두-” 거리면서 앨범을 시작하는 산뜻한 타이틀 트랙의 감미로운 멜로디와 (다소 유치하긴 해도) 하이틴 영화 시나리오 같은 스토리텔링을 이어나가는 가사는 싱글로 채택된 곡들에 비견될 정도로 매력적이고, 자신의 마음을 자꾸 아프게 만드는 연인에게 계속 다가가려는 심리를 그린 “Self Inflicted”의 파워풀한 기타 리프는 같은 주제의 다른 노래들보다 상당히 직설적으로 쓰인 가사를 매력으로 승화시킨다. 비교적 무난하게 흘러가는 편이긴 하나 “If You Can Afford Me” 같은 트랙들은 우리가 흔히 팝-록 장르에 기대하는 것들을 그대로 들려준다.
물론 그저 가볍게 넘겨 듣기 힘든 곡들도 존재한다. “나 같은 인기녀의 마음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마네킹 같은 답답한 너란 남자!”를 부르짖는 “Mannequin”은 과도한 보컬의 사용이 부담스럽게 느껴지며, 진솔함을 담담하게 노래해야 할 발라드 트랙 “Lost”는 지나치게 예쁘게 꾸미려는 산운드 구성과 맞물린 진부한 캐치프레이즈와도 같은 “길을 잃었다고 느껴본 적이 있나요?”와 같은 가사로 인해 상당히 엉성하게 느껴지고 만다. 요상한 멜로디로 확 튀는 “Ur So Gay”는 애초에 농담조로 만든 트랙이긴 하겠지만, 그럼에도 굳이 다른 노래들과 함께 듣고 싶어지는 곡은 아니다.
의외로 음반의 하이라이트는 케이티 페리가 부끄러움 없이 자신을 감추지 않고 솔직해지는 순간에 나타난다. 그리 강한 인상을 남기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을 버린 연인을 향해 제대로 교육도 받지 못한 사람이라고 담담하게 자신을 낮추는 “I’m Still Breathing” 속 가사 한 줄 만큼은 애처로움의 감정을 깊게 파고든다. 발라드 트랙 중에서 가장 정점은 터져 나오는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발산하는 “Thinking of You”다. 곁을 떠난 연인을 그리워하면서 서툰 표현으로 그를 묘사하는 세련되지 못한 문장들이 노래에 애틋함을 더욱 불어 넣어준다. 더군다나 작곡 크레딧에 올라가 있는 이름은 그녀뿐이니, 그녀의 멜로디 메이킹 능력 또한 재고하게 만드는 곡이다. 그리고 경쾌하게 앨범의 엔딩을 장식하는 마지막 트랙 “Fingerprints” 속 패기 넘치는 그녀의 모습은 이후 디스코그래피의 마지막 곡을 발라드로만 골라놓은 것과 비교하면, 어쩌면 CCM 앨범의 실패 이후 더는 잃을 게 없었던 시절이었기에 보여줄 수 있었던 도전적인 자세로 느껴진다.
진지함이란 거의 찾아보기 힘든 얄팍한 주제와 이를 수습하지 못하는 세련되지 못한 작사 능력, 그리고 그녀 앞에 존재했던 트렌드에 가볍게 편승하는 앨범이기에 One of the Boys는 고평가받을 요소가 적은 작품이긴 하다. 하지만 굳이 꼬치꼬치 따지지 않는다면 마음 한구석을 비워두고 무난히 즐길만한 앨범이며, 작가주의 타령을 늘어놓는 “Rockism”의 안경을 벗어놓고 “Poptimism”의 관점에서 본다면 그렇게 나쁠 것도 없는 작품이다. 게다가 억누를수록 답답해지는 케이티 페리의 보컬을 가장 시원시원하게 살려주는 음반이기도 하다. 몇 년째 자신이 나아가야 할 음악적인 방향에 대해 고심하고 있는 케이티 페리에게, 기타를 짊어진 채 유쾌하게 목소리를 높이던 2008년의 추억을 다시 떠올려 줄 필요도 있어 보인다.
(원 게시일: 20.1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