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rth / song by Grimes
길지는 않지만 2015년부터 그라임즈라는 아티스트를 알아온 입장에서, 서서히 그녀가 그녀의 음악과는 관련 없는 다른 수식어로 덮이는 모습은 어딘가 씁쓸함을 자아낸다. 가장 대표적으로는 일론 머스크의 애인 따위의 타이틀이 그렇다. 분명히 내가 아는 그라임즈는 그냥 인디 뮤지션 그라임즈 뿐이었는데. 이런 상황을 보면 여성의 관점에서 사랑이 커리어에 있어서 장애물과 여성으로서의 힘을 잃게 만드는 존재가 되기도 한다는 그녀의 생각은 충분히 일리 있게 들리고, 그런 두려움에 또한 자연스레 공감하게 된다. 그렇기에 서서히 지상으로 몸을 끌어내리는 사랑을 노래하는 본 트랙은 더욱 무겁게 느껴진다.
무기력하게 흐느적거리는 그라임즈의 보컬을 듣다 보면 광활한 우주에서 자유롭게 유영을 하는 것 같다가도, 곡 전체를 감싸는 둔탁한 비트가 그 몸을 지상으로 끌어당기는 중력처럼 다가선다. 이는 마치 한 마리의 나비가 되어 날아가며 끝맺음했던 Art Angels와 반대되는, 현대적인 관념의 신과 악마들이 인류를 지배하고 있는 Miss Anthropocene의 디스토피아 세계로 우리를 새로이 인도하는 것 같다. 완전히 뒤바뀐 세계관에 대한 명료한 해설이자 감미로운 오프닝 트랙이다. 듣다 보면 마치 SF 영화의 사운드트랙을 듣는 것 같은 시네마틱함까지 느껴지는데, 언젠가 클레어 부셰가 영화를 감독한다면 꼭 이 노래가 삽입되어야 할 것 같다.
(원 게시일: 20.07.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