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원(壯元), 과거시험에서 가장 높은 성적을 받은 사람, 즉 수석에게 주어지던 칭호였다. 그 빛나는 이름을 외할아버지는 엄마에게 주셨다. 당시의 외할아버지가 어떤 마음으로 그 이름을 지으셨을지 가끔 상상해 본다. 첫 딸을 품에 안고는 그 딸이 특별한 삶을 살게 될 것이라고 믿으셨던 것일까? 아니면 단순히 장원이라는 이름에서 배어 나오는 웅장함과 품위가 마음에 드셨던 것일까? 이유가 무엇이든 엄마는 ‘장원’이라는 엄마만의 무게와 품위를 지닌 이름으로, 삶의 첫발을 내디뎠고 그 이름은 엄마의 삶에 깊이를 더해갔다.
하지만 엄마의 삶은 이름처럼 빛나지는 않았다. 엄마보다 늦게 들어온 새 시어머니의 시집살이를 피눈물로 견뎌내야 했고, 내리 딸만 낳는다고 구박하는 시어머니에게서 첫국밥도 못 얻어 드신 채, 산고를 홀로 견디다 까무라치기도 했다. 끼니거리가 없어 보리쌀을 꾸러 다니는 것은 다반사였다. 이런 혹독한 삶 속에서도 엄마는 늘 강인한 모습을 잃지 않으셨다. ‘장원’다운 삶은 바로 엄마의 신념이었다.
이름은 한 사람의 정체성과 삶의 방향을 담아낸다. 요즘은 개명이 법적으로 큰 제약을 받지 않아, 많은 사람이 자신의 삶에 더 잘 맞는 이름을 선택하기도 한다. 개명을 하는 이유는 다양하다. 이름이 불운을 불러온다고 믿거나, 발음이 어렵고 부르기 어려운 경우, 또는 이름 때문에 놀림을 받거나 불편함을 느꼈던 경험에서 비롯된다. 이름이 지닌 무게와 의미가 크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엄마는 늘 이름에 담긴 의미를 충실히 살아내셨고, 그 모습은 우리에게 큰 본보기가 되었다.
이런 엄마의 이름은 가족 모임 속에서도 빛을 발했다. 친정 가족 모임이 있는 날에 우리는 자주 고스톱 판을 벌였다. 아이들이 어릴 적에는, 윷놀이가 우리 집안의 주된 놀이였다. 그러나 아이들이 하나둘 자라면서 자연스럽게 그 자리를 고스톱이 대신하게 되었다.
우리 가족에게 고스톱은 단순한 놀이 이상의 의미를 가졌는데 말수가 적은 아버지와 소통할 수 있는 특별한 이벤트이기도 했다. 평소에는 말 한마디 없이 조용히 계시던 아버지가 고스톱을 할 때만큼은 의외로 말이 많아지셨다. 손에 든 패를 자랑하기도 하고, 재치있는 농담으로 분위기를 띄우기도 하셨다.
딸과 사위가 오는 날이면 엄마와 아버지는 잊지 않고 백 원짜리 동전을 잔뜩 바꿔놓으며 전투를 준비하듯 만반의 준비를 해놓으셨다. 저녁 식사가 끝나기 무섭게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으레 국방색 군용담요를 두툼하게 깔고 화투를 꺼내 들었다. 이 전통은 누가 시키거나 강요한 것도 아니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아무도 거부하지 않는 자연스러운 가족의 의식이 되어버렸다.
점 백짜리 고스톱은 시작부터 시끌벅적했다. ‘고’와 ‘스톱’의 외침이 거실을 가득 메웠고, 게임은 새벽까지 이어지기 일쑤였다. 엄마는 늘 그랬듯, 고스톱판에는 끼지도 못한 채, 거실과 부엌을 종종걸음으로 오가며 술과 과일을 내오셨다. 담요 위에서는 화투판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좋은 패가 들어오지 않으면 “한 판 쉴게!” 하며 광을 팔기도 하고, 상대방의 패를 추측하며 묘한 신경전을 벌였다. 팔이 아프도록 화투를 뒤집고 점수를 따려 안간힘을 쓰는 모습에선 묘한 진지함마저 느껴졌다.
그러다 누군가 점수를 크게 따면 분위기는 순식간에 반전되었다.
“장원이다!”
외치며 환호가 터졌고, 나머지 사람들은 아쉬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웃음을 참지 못했다. 고스톱판은 그 자체로 우리 가족의 소소한 즐거움이었다.
"장원이다!“
라는 외침 속에 엄마의 이름이 자연스럽게 등장할 때마다, 엄마의 이름은 가족의 친밀함과 사랑의 상징처럼 느껴졌다. 고스톱판 위에서 엄마의 이름은 모두를 웃게 하고, 가족을 하나로 묶어주는 연결고리가 되었다.
우리 가족에게 고스톱은 단순히 돈을 따고 잃는 게임이상이었다. 그것은 시간을 함께 보내고,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을 나누는 방식이었다. 게임이 끝난 후 누가 이겼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이면 잃은 돈만큼 모두 돌려받았기에 결국엔 돈을 딴 사람도 잃은 사람도 아무도 없는 게임이었다.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었고, 함께 떠들며 웃을 수 있어 좋았으면 된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순간순간에 열광하고 서로를 놀리고 웃으며 게임을 즐겼다.
“장원이다”
라는 외침과 함께 터지는 웃음소리는 담장 밖까지 퍼져나가며 게임의 승패를 넘어 함께 보낸 시간 자체가 소중한 추억이 되었다. 돈을 따거나 잃는 것은 그저 핑계였을 뿐, 진정으로 얻은 것은 가족 간의 유대와 사랑이었다. 그렇게 엄마의 이름이 더해진 우리 가족의 고스톱은 단순한 놀이를 넘어, 서로의 마음을 나누고 함께하는 기쁨을 재확인하는 소중한 시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