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가 순백의 은빛으로 물든 어느 겨울날, 엄마는 손님 배웅을 나갔다가 얼음판에 넘어졌다. 그 충격으로 엄마의 허리는 뜨거운 물 속에 들어간 새우마냥 잔뜩 굽어 버렸다.
온 나라가 떠들썩하게 대학 입시를 치룬지 한 달쯤 지난 어느 겨울, 시골 동네에 같이 살던 아주머니가 우리 집을 방문하겠다며 전화를 걸어왔다. 대전으로 이사온 지 꽤나 시간이 지났고 그동안 서로 얼굴을 보지 못했기에 갑작스러운 아주머니의 방문 소식에 우리는 조금 의아해하면서도 반가운 마음으로 기다렸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때쯤 귤 한 봉지를 손에 들고 아주머니가 도착했다. 오랜만의 반가운 만남에 우리는 따뜻한 커피를 내어드리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커피 잔 위로 피어오르는 김 사이로, 아주머니는 조심스럽게 이번 방문의 이유를 털어놓으셨다.
아들이 이번에 대학에 진학하게 되었는데 무슨 과를 가야 할지 막막해서 조언을 구하러 왔다는 것이었다. 우리 오빠는 그 당시 잘 나가는 국립대학교에서 조교를 하고 있었기에 오빠만큼 조언을 잘 해 줄 사람이 없을 것이라 여기셨단다. 아주머니는 남에게 손 벌리지 않을 만큼 재산도 있었으나 자식을 못 낳아 노심초사하시다가 오십 줄에 들어서야 시동생의 아들을 양자로 들여 키우셨다. 이제 그 아들이 장성하여 대학갈 나이가 되었고 이 아들을 대학에 보내는 것이 평생의 소원이라고도 하셨다. 한참 동안 정겨운 고향 이야기로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대화가 길어졌고 어느새 저녁 시간이 다 되었다. 굳이 가시겠다는 아주머니를 붙잡아 엄마는 저녁 대접까지 하셨다. 이것저것 지지고 볶아 먹음직스런 한 상을 뚝딱 차려내고는 대문 밖에서 배웅을 해도 될 것을 엄마는 버스 정거장까지 배웅을 하겠다며 기어이 따라 나섰다.
얼마나 지났을까. 엄마가 돌아올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도 소식이 없었다. 걱정스러운 마음에 마중을 나가려 했지만 여러 갈래로 나뉜 길 중 어디로 오실지 알 수 없어 초조하게 집에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아는 분을 만나 눈보라 속에서 얘기를 나누는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애써 마음을 가라앉혔지만 불안함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불길한 예감은 틀리는 법이 없다. 그렇게 30여 분쯤 지났을까. 캄캄한 어둠을 찢는 초인종 소리가 소름이 돋을 만큼 오싹하게 들렸다. 현관문을 열고 나가보니 웬 낯선 아주머니가 엄마를 부축하고 서 계셨다. 눈밭에 쓰러져 정신을 잃은 엄마를 발견해 모시고 왔단다. 엄마는 아는 분을 만나 이야기하시던 것이 아니라 무릎까지 쌓인 눈밭에 쓰러져 정신을 잃고 계셨던 것이다. 그 분의 도움으로 집까지 간신히 오실 수 있었지만 얼마나 오래 쓰러져 있었는지 엄마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셨다. 늘 쳐있던 커텐을 보고 왜 쳤느냐, 이 이불은 누구네 것이냐며 알 수 없는 이야기만 하셨다. 밤이 깊었기에 일단 집에서 주무시고 다음날 병원에 모시고 가기로 했다. 다행히 검사 결과 큰 문제가 없다는 진단을 받았다. 엄마의 기억도 서서히 돌아왔지만 그날 눈밭에 쓰러졌던 일과 헛소리를 했던 기억만큼은 끝내 기억하지 못하셨다.
그러나 그 다음 해, 엄마에게 또다시 시련이 찾아왔다. 새벽예배를 드리러 집에서 2분 거리에 있는 교회를 향하던 중 또 낙상사고를 당하셨다. 작년에 넘어져 다친 허리에 다시 충격이 가해졌고 이번에는 병원에 입원해야 할 정도로 심각한 부상을 당했다. 병원에서도 입원하여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권유했지만, 엄마는 가족들 걱정에 통원치료를 받겠다고 고집하셨다. 아픈 허리로 매일 병원을 다니며 치료받는 일은 생각만큼 쉽지 않아 몇 차례 치료를 받던 엄마는 결국 힘에 부쳐 치료를 중단하고 말았다.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한 채 시간이 흐르면서 엄마의 허리는 점점 더 굽어졌고 유모차 없이는 걷기도 서 있기도 힘든 몸으로 변해버렸다. 길가에 버려진 낡은 유모차를 주워 와 그것에 의지하기 시작했다. 유모차는 엄마의 허리가 되고 다리가 되었다. 유모차 없이는 90도로 굽는 허리를 버틸 재간이 없었기에 그것은 엄마 삶의 일부분이 돼버렸다.
그때 엄마를 제대로 치료받게 하지 못했던 일이 지금도 가장 후회된다. 가족들 걱정을 덜어주려는 엄마의 고집을 설득하지 못한 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엄마가 치료를 포기하겠다고 하셨을 때, 살림 걱정은 하지 말라며 내가 좀 더 단호하게 붙잡고 병원에 모시고 갔더라면 어땠을까. 더 오래, 더 건강하게 우리 곁에 계실 수 있었을까. 이 생각은 10년이 지난 지금도 내 마음 한구석을 놓아주지 않는다.
엄마가 세상을 떠나신 지 벌써 10년이 흘렀다. 굽어진 허리로 유모차를 붙잡고 힘겹게 걸음을 내디디던 모습은 어제 일처럼 여전히 또렷하게 떠오른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엄마가 남긴 삶의 무게와 깊이를 이해하게 되었다. 엄마의 삶은 늘 우리를 위한 희생과 사랑이었음을 뒤늦게 깨달았지만 그 사랑을 내 삶의 일부로 품고 살아가고 있다. 비록 지금은 엄마를 다시 만날 수 없지만, 엄마의 사랑은 여전히 내 안에 살아 숨 쉬고 있다.
“엄마, 보고 싶어. 유모차를 다리삼아 힘들게 걷던 모습이 아니라, 웃음 가득한 건강한 모습으로 한번만이라도 내 꿈속에 찾아와 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