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글에 관한 두번째 이야기
매일 아침 침대에서 일어나 잠들기 직전까지 글에 대한 생각으로 하루를 보낸다. 이 일은 너무 익숙하여 머리로 생각하지 않아도 몸이 먼저 반응한다. 그저 나의 글에 몰입하는 순간을 즐긴다. 16년째 홀로 글을 쓰고 있기에 가능한 하루 루틴이겠다.
최근, 마트에서 일하며 직접 겪은 일을 글감으로 모으고 있다. 마트 공간에서 일어난 모든 일은 사람과 관련되기에 다양한 문제, 이야기, 말, 생각 등이 오간다.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내적 여운이 남을 때가 종종 있다. 일에 익숙해지면서 현실 속 삶을 글로 표현하고 묘사하는 단계로 진입했다. 희노애락을 그대로 나만의 작품으로 해석하고 쓰여진다.
재작년 퇴사 직후의 기억도 떠오른다. 글쓰는 작가의 길로 가겠다고 말을 했을 때 아버지의 반응이 정말 안 좋으셨다. 경제적인 문제를 말하셨는데 듣다 보면 자기 말대로 하라는 건지 나의 진짜 삶의 목표를 말하라는 건지 혼란만 주고 마음의 상처까지 곁들었다. 기억하기 싫은 일이기에 희미한 기억을 되살려 보자면,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경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어디서 뭘 하고 있느냐 지금 니가 해야 할 일은 안 하면서 어딜 돌아다니느냐, 앞으로 무엇을 할 건지 이야기 해봐라 등의 말을 했다. 중요한 건, 현실 문제를 자각하라는 말씀인 건 알겠는데 인생 목표, 계획을 구체적으로 말했음에도 그건 됐고 돈 문제를 해결할 방법 같은 말을 하라는 듯 결론이 상당히 흐지부지 했었다. 지금은 내가 하는 것에 뭐라 하시지 않지만 당시를 떠올려 보면 지금도 전혀 이해 할 수 없다.
더군다나 부모님께 작가로 인생을 걸었다는 언급을 했고 집밖을 나왔을 때 혹시나 아버지께 전화가 올까 하는 초조함이 있었다. 아무 것도 보여 줄 것이 없었기에 마음이 급해져 지금 당장의 수입 고민에 빠질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아버지께 전화 왔을 때 나의 경제 상황에 대한 걱정이 급증했고 아침에 어머니의 경제적 한소리에 작가에 대한 마음이 꺾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혼자 이겨내야 할 과정이긴 하지만 혼자라는 것이 어느 누구에게 말하기 힘든 싸움이었다.
글과 동떨어진 이야기다. 글을 업으로 아니, 삶의 목표로 삼았을 때 부모님 반응이 이러 했다는 걸 짧게 나마 말하고 싶었다.
현재의 고통에서 벗어나기란 쉽다. 누군가와 함께 생활하는 공간에서 서로 소통이 안된다면 사소한 것도 고통스럽게 느껴진다. 선택을 하게 된다. 소통 불통에 맞설 것인지, 그냥 회피해 버리는 지 말이다. 항상 후자를 선택했다. 지평선에 해가 올라오기 전, 공동의 공간에서 밖으로 마주함을 피해 버린다. 올해 시작하고 해 뜨기 전 도피(?)는 반복되고 있다. 잘못을 저지른 것도 아닌데 그냥 소통을 피했다. 모든 생산적 활동이 멈추는 날, 그냥 공동의 공간에 머물러 있는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고요했다. 혼자만의 과민 반응이다. 성급한 판단으로 생산의 시간을 일찍 가동했지만, 내적 공간은 그대로 멈춰 있다.
하루의 시간은 정직하게 흘러가고 인간은 24시간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누적된 삶의 방향이 달라진다. 글도 비슷하다. 외면의 세상은 물리적 공간 흐름에 자신이 존재하고 오감으로 느낀 것들로 글로 쓴다. 이것이 누적되어 자신 만의 작품이 탄생 된다.
내면의 세상은 무한한 이상 세계로 시간, 공간이 새롭게 만들어진다. 과거, 현재, 미래는 파동의 물결을 탄다. 지금 있는 곳은 안 인지 밖 인지 모른다.
글의 루틴은 자신의 메시지를 만드는 창조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