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 끊긴 신호음, 3장
며칠이 흘렀다. 머릿속은 여전히 복잡했지만,
애써 아무 일 없는 듯 지냈다.
통화는 꿈처럼 멀어졌다.
평소 같았으면 피곤해서
알람이 울려도 쉽게 몸을 일으키지 못했을 텐데,
그날은 이상하게도 알람이 울리기 전에 눈이 떠졌다.
희미하게 아침 햇살이 커튼 사이로 번졌고,
머릿속이 오랜만에 맑은 날.
샤워를 마치고 출근 준비를 하고 있을 때
모르는 번호가 걸려왔다.
잠시 망설였다.
‘내가 전화를 잘 안 받으니까 아빠가 이번엔 황 여사님 번호로 거는 건가?’
받지 말까 하다가,
왠지 모를 불길한 기분에 손이 화면 위로 올라갔다.
‘에이… 설마. 아닐 거야.’
최대한 담담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응... 영락아 아빠 돌아가셨어. 지금 전주 예수병원 응급실에 있어."
“……언제요? 어떻게요?”
입에서는 그렇게 흘러나왔지만, 머릿속은 텅 비었다.
그토록 죽기를 바라던 사람이 정말 죽는다는데,
기쁨도 슬픔도 없었다.
그냥, 모든 게 멈춘 듯했다.
‘이제 나는 아버지 없는 자식이구나.’
이 생각의 다음은 돈이었다.
사연 없이 사는 사람은 없다지만,
사연보다 급한 건 늘 현실이었다.
그건 슬픔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내 통장엔 백만 원이 있었고,
5년째 붓던 적금을 깨면 천만 원 정도.
그걸 다 써서 장례를 치르면 남는 건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한심하다.’ 스스로를 그렇게 부르며,
‘그래도 어쩌겠어, 현실이니까.’
그 말로 생각을 마무리했다.
“영락아…”
황 여사의 울먹인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새어 나왔다.
“아침에 갑자기 쓰러지셔서 119에 실려 갔는데…
의사가 지병이 있었냐고 묻더니,
5분 정도 심폐소생술 하다가… 결국…”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나는 이미 결과를 알고 있었다.
나는 숨을 고르며 말했다.
“네. 형한테 먼저 연락하고 다시 전화드릴게요.”
“응… 근데, 저기…”
“왜요?”
“응급실 비용이 좀 나와서…”
사람 마음이란 참 간사했다.
몇 초 전까지만 해도
‘돈 걱정하는 내가 한심하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황 여사 입에서 그 말이 나오자
‘그 정도는 같이 살던 당신이 내줄 수 있잖아요?’라는
비열한 생각이 먼저 들었다.
“예, 그건 제가 처리할게요.”
“아, 그리고 또…”
“또 뭐요?”
“아니 그게… 너희 아빠 월세가 아홉 달이나 밀렸고,
마트랑 술집 외상값도 좀 있어…”
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
참 한결같은 사람이었다.
물려받을 유산 따위 없다는 건 진작에 알고 있었지만
죽어서조차, 남긴 건 빚이라는 또 다른 고통이다.
형과 나는 연민에 못 이겨 가끔씩 아버지에게 월세를 보내고,
용돈을 드리곤 했다.
이제 와 생각하니,
그 돈은 고스란히 소주 값이 되었을 것이다.
‘정말, 변하지 않는 사람이지.’
외상이라는 캐캐묵은 단어가 이렇게까지 감정을 끌어올릴 줄이야.
“예, 알겠어요. 그것도 처리해 볼게요.
우선 형한테 전화하고 다시 연락드릴게요.”
전화를 끊자마자,
묘하게 정신이 또렷해졌다.
속상함보다 현실감이 먼저 밀려왔다.
현서는 통화 내용을 전부 들은 눈치였다.
아버지를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현서는
나보다 더 당황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그 눈빛엔 놀람보다,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모르는 막막함’이 섞여 있었다.
잠시 스친 표정 속엔, 오래전 자신이 겪었던 이별의 기억이 겹쳐 보였다.
나는 괜찮다는 듯 미소를 지었지만, 입가가 자꾸 떨렸다.
걱정 말라는 눈빛을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에서는 이상하게 숨이 가빠졌다.
그리고 곧장 형에게 전화를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