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 끊긴 신호음, 2장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분노보다 먼저 올라온 건, 한없이 멀어진 사람에 대한 허무였다.
그러나 곧 분노가 나를 삼켰다.
“……뭐라고? 술 먹고 제정신 아닌 소리를 해도 정도가 있지,
어떻게 나한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
사랑? 엄마? 뭣 같은 소리 하네, 진짜.”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
그 말이 입 밖으로 새어 나올까 봐, 핸드폰을 던지듯 끊었다.
아버지가 다른 여자와 함께 살고 있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그 사실이 당연하면서도 참을 수 없이 분노를 불렀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엄마가 다른 남자를 만난다는 사실에는 화가 나지 않았다.
엄마가 아저씨를 내게 처음 소개하던 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도 엄마이기 전에 한 사람이고,
평생을 상처받고 희생하며 살아왔으니
이제는 자신을 위해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저씨는 아버지와 달랐다.
술을 입에 대지도 않았고, 묵묵히 일하며 엄마를 존중했다.
엄마는 아저씨를 만난 뒤 웃는 일이 많아졌다.
시장 옷가게 대신 백화점에 갔고, 평생 꿈꾸던 해외여행도 다녀왔다.
예쁜 옷을 입은 엄마는, 그때 비로소 ‘여자’로 보였다.
그 모습이 나는 좋았다. 진심으로 좋았다.
하지만 아버지는, 늘 그랬다.
엄마와 함께 살 때도 다른 여자를 만났고,
심지어 내 눈앞에서 다른 여자와 함께 있는 모습을 보인 적도 있었다.
이번에도 달라질 리 없었다.
아버지 곁에 있는 황 여사 역시 술에 의지한 사람이었으니까.
그 둘이 함께라면, 서로의 구멍을 메우기보다 더 깊이 빠질 것 같았다.
그날, 나는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당신’이라고 말했다.
두려워하던 존재에게 난생처음 반말을 섞어 울분을 토했다.
입에서 쏟아진 말들이 내 의지보다 빨랐다.
어릴 적, 한 번의 눈빛만으로도 얼어붙던 그 앞에서
이제는 내 목소리가 그의 말을 덮고 있었다.
말이 끝나자, 가슴이 이상하게 떨렸다.
통쾌함도, 후련함도 아니었다.
내가 감히 그에게 대들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토록 두려워했던 사람이었는데,
정작 무너진 건 아버지가 아니라 나 자신 같았다.
핸드폰 너머로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곧, 끊긴 신호음만 남았다. 아빠 전화는 받지 않는 것이 정신 건강에 도움이 된다는 걸
다시 한번 뼈저리게 깨달았다.
그날 이후, 몇 달 동안 걸려오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오빠, 아버님 전화 또 왔어.”
현서의 목소리가 조용히 방 안을 울렸다.
나는 핸드폰 화면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받지 마. 또 술 마시고 헛소리야.”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
그 짧은 대화만으로도, 공기 속에 묘한 침묵이 흘렀다.
핸드폰 화면의 불빛이 꺼질 때마다, 마음 한쪽이 따라 꺼지는 기분이었다.
그날 밤, 이상하게 잠이 오지 않았다.
감정이 요동칠 때의 나는, 웃기게도 결국 같은 방식으로 하루를 버텼다.
술잔을 들었다.
이상하게도, 그런 날엔 아빠가 떠올랐다.
그때, 벨이 울렸다.
술기운이 돌던 나는 그 전화를 받아버렸다.
“내가 췌장암 2기란다. 이제 다 끝났다.”
"내가 죽더라도 너는 울지마라."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의 목소리는 예전보다 조용했지만, 낯설게도 평온했다.
평생을 미워했던 사람이 죽음을 말하는데,
내 안의 감정은 단 하나도 이름 붙일 수가 없었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아빠가 죽긴 왜 죽어요.
그리고 울지 말라는 건 또 무슨 말이에요, 도대체.”
“나는 너한테 해준 게 없잖냐.
아빠로서 늘 창피했다. 걱정만 주고, 상처만 줬으니까.”
그 말이 너무 담담해서 더 화가 났다.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정신 차리고 술 끊고,
병원 다니고, 치료받고, 살아야죠.
왜 자꾸 죽는다는 소리만 해요.”
“……새끼, 꼬박꼬박 말대답은 잘하네.
이제 진짜 다 컸구나.”
그 웃음이, 이상하게 슬펐다.
“그럼요. 막둥이가 벌써 서른이에요, 아빠.
그러니까 그런 소리 그만하고 얼른 주무세요.”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 뒤로 희미한 TV 소리와, 잔 부딪히는 소리가 섞여 들렸다.
그때, 핸드폰 너머로 또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당신, 그만 좀 해! 자식들한테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술 좀 그만 마셔!”
황 여사의 목소리였다.
나는 그 소리에 반사적으로 숨을 삼켰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전화를 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