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떠난 자리에 내가 남았다.

2부 : 끊긴 신호음, 4장

by 여우비

우리 형은, 내가 견딘 아버지의 폭력을 더 먼저, 더 깊이 견뎌낸 사람이었다.

아빠가 술에 잔뜩 취해 우리 형제들에게 분풀이를 하던 날이면,

형은 나를 감싸 안고 대신 맞았다.

막둥이라는 이유로 나는 피했고,

형만 맞았다.


그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그래서 형은 아빠의 죽음을 나보다 더 무겁게 받아들일 것이다.

내 감정이 회색이라면, 형의 마음은 거의 검정에 가까웠을 것이다.


“여보세요? 형, 아버지 돌아가셨대.”

“……뭐?”

적잖이 놀란 형의 목소리가 떨렸다.

“아버지 돌아가셨대. 황 여사님한테 전화 왔었어.”

“……아휴, 일단 알겠어. 형이 직접 전화해 볼게.”

“응, 전화 줘.”


전화를 끊자, 방 안이 조용해졌다.

현서는 여전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이 그 따뜻함이 편하지는 않았다

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런 현서를 바라보며 다시 돼 내었다.

오늘, 아버지가 죽었다.

그리고 그 죽음 직전까지, 나는 아버지를 미워했다.

미워할 이유는 여전히 많았다.

다만, 그 이유들이 지금 이 순간엔 전부 흐릿해졌다.

분노와 공허가 뒤섞여, 어느 쪽이 더 무거운지도 알 수 없었다.


“엄마, 아빠 돌아가셨어요.”

“……왜?”

“몇 달 전에 췌장암이라 하셨는데,

오늘 아침에 집에서 쓰러지셨대요.

같이 사는 분이 119에 신고했는데,

병원 옮기자마자… 가셨대요.”

“……결국 갈 때도 지 맘대로 가는구나, 네 아빠는.”

“……그러게요.”

“그래, 아들. 조심히 올라와. 뭐든 바로 전화하고.”

“네, 엄마. 이따 봬요.”


통화를 끊자, 방 안이 조금 더 조용해졌다.

나는 스물아홉 살에 서울을 떠나 제주로 내려왔다.

서른을 앞둔 그해, 도시는 내게 더 이상 숨 쉴 틈을 주지 않았다.

그곳에서는 잠시 모든 걸 잊을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결국, 잊으려 떠난 그곳에서 다시 돌아가야 하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항공권을 검색하던 중, 형에게서 전화가 왔다.


영락아, 형이 예수병원 응급실이랑 통화했는데

장례를 치르려면 직계가족 중 한 명이

직접 시신 확인하고 검시필증 받아야 한대.

그다음 경찰서에 들러서 절차도 밟아야 하고.

너보단 형이 빨리 갈 수 있으니까

우선 전주 내려가서 처리할게.”


“응. 형, 그럼 나는 전라도로 가면 돼?

아니면 서울로 가면 돼?”

“아, 맞다. 형이 철용이 형이랑 숙미 누나한테도 연락했거든.

숙미 누나 지인 중에 장례지도사분이 계셔서

“할아버지 장례식 했던 곳 알지? 그 장례식장에서 진행하려고 해.

너는 서울행 티켓 끊고 형 집에서 기다려.”

나는 전주에서 절차 끝내고

앰뷸런스로 아빠 이송해서 서울로 갈게.”


현실감이 조금씩 밀려왔다.

죽음이라는 건,

조용히, 아주 무겁게 완성되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엄마와 이혼한 뒤

작은아버지의 권유를 따라 고향인 전라도로 내려갔다가

결국 작은아버지와도 멀어지게 되어 홀로 살았다.

그는 끝내 누구의 곁에도 오래 머물지 못했다.

죽어서조차 제자리를 찾지 못한 채

전주에서 인천으로,

차가운 몸으로 옮겨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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