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떠난 자리에 내가 남았다.

2부 : 끊긴 신호음, 8장

by 여우비

"영락이 너, 외할아버지 기억나?”

나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내 기억 속의 외할아버지는 늘 따뜻한 분이었다.

정원사 일을 하시며 오토바이에 태워주시던 분.


“우리 강아지 신나?” 하고 웃던 목소리,

방바닥에 나를 앉혀놓고 귤을 까주시던 손,

밥 먹는 모습을 바로 앞에서 지켜보시며

‘잘 먹고 있냐’고 다정하게 웃던 얼굴.

내가 일곱 살이 되던 해, 그분은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엄마의 표정은

내 기억 속 그 온기와는 달랐다.


“넌 몰랐을 거야.”

엄마는 잠시 시선을 떨구었다.

“너희 외할아버지가… 엄마 어렸을 땐 거의 군인이었어.”


엄마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숙제를 하루라도 미루면 회초리가 날아왔고,

집안일은 너희 외할머니랑 내가 다 했지. 빨래, 밥상 차리기, 청소까지.”


그 말을 듣는 동안,

나는 마치 그 시절의 집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열여섯 살의 엄마가 있었다.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마루를 쓸고, 부엌을 닦는 아이.

일을 마치고 돌아온 외할아버지가

하얀 장갑 낀 손으로 장식장을 문지르던 장면.

그 손끝에 먼지가 닿는 순간,

집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엄마의 하루도, 그 순간 멈췄을 것이다.

“통금은 네 시였어.”

엄마는 어딘가 허탈하게 웃었다.

“종례 끝나자마자 뛰었지.

친구들이 떡볶이 먹으며 웃을 땐, 나는 달리고 있었어.”


엄마는 잠시 숨을 고르고 말을 이었다.

“그때 체육 선생님이 나한테 그랬어.

‘혜영아, 너 달리기 정말 빠르다. 육상부 들어오지 않을래?’

그 말이 너무 좋았는데… 결국 못 했지.”


“왜?”

내가 묻자, 엄마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달리기를 잘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집에 늦는 게 문제였거든.”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머릿속에 그 시절의 엄마가 그려졌다.

빨간 노을이 번지는 운동장,

모래 위를 고무신으로 달리는 한 소녀의 모습.

누구보다 빨랐지만,

늘 집으로 돌아가는 길만 달릴 수밖에 없었던 아이.


“그땐… 너희 외할아버지가 세상에서 제일 무서웠어.”

마치, 내가 엄마의 과거를 묻는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엄마는 말을 이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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