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떠난 자리에 내가 남았다.

2부 : 끊긴 신호음, 9장

by 여우비

“그러다… 너희 외할아버지한테 크게 혼난 날이 있어.”

“근데 그다음 날이 친구 생일이었거든.

그땐, 아무리 생각해도 이번엔 꼭 가고 싶었어.”

“마침 아버지가 친척 어르신 댁에 갔었어.

그게 나한텐… 처음 찾아온 자유였지.”

“너희 외할머니한테 전화를 걸었어.

‘하룻밤만 친구 집에 잘게요.’

그 말, 아직도 기억나.”

그 말 끝에는 묘한 떨림이 섞여 있었다.

“그 안엔 설렘이랑 두려움이 같이 있었어.

두 가지 세상이 한 문장 안에 들어 있었던 것 같았거든.”


“그날 밤, 열여섯 살의 나는

처음으로 세상의 밤공기를 마셨지.

그 공기… 달콤했어. 근데 무서웠어.”

“세상은 생각보다 넓었고,

우리집은 생각보다 작았어.”

“그 다음 날 아침이 문제였어.

집에 돌아가면 또 혼날 게 뻔했거든.

그래서 그냥, 길을 바꿨어.”

“그게… 내 첫 가출이었지.”

잠시 말이 멈췄다.


“그 뒤로 너희 외할머니한테만 전화했어.

일해보고 싶다고 했지. 공부는 싫다, 그런 핑계였어.”

“할머니가 뭐라고 하셨어?”

“한참 말이 없으시더라.

그러더니 그냥 그러셨어.

‘그래, 가보고 싶으면 가봐라.’

그 한마디 듣는데 눈물이 나더라.”

“며칠 뒤, 막내이모가 하는 공장으로 갔어.

양말 만드는 곳이었지.

처음엔 괜찮았어.

밥도 주고, 일도 단순했거든.”


“근데 밤이 되면 이상했어.

집에 가고 싶었어. 근데 또 가기 싫었어.

그게 제일 힘들었어.”

“라디오에서 '나는 어떡하라고' 가 나오면 항상 울었어.

왜 우는지도 몰랐어. 그냥 눈물이 나더라.”

“밤마다 이불 뒤집어쓰고 울었어.

이모가 들을까 봐, 숨참으면서.”

잠시 고요가 흘렀다.


“그러다 어느 날 너희 외할머니한테 또 전화했어.

‘엄마, 나 더 큰 세상도 한 번 보고 싶어요.’

그렇게 말했지. 사실은 도망치고 싶었던 건데.”

“결국 또 허락하시더라.

그래서 수유리 쪽 봉제공장으로 옮겼어.”

“거기서도 많이 울었어.

근데 이번엔 좀 달랐어.”

“왜?”

“아무도 나를 몰랐거든.

그래서 울어도 괜찮았어.”

“그렇게 1년쯤 지났을까.

추석이 다가왔어.

공장이 문 닫는 날이었지.

다들 고향 간다고 떠나는데… 나는 남았어.

서울에 있으면서도, 집에는 가기 싫더라.”


“그때 한 동료가 그러더라.

‘혜영 씨, 나 전라도 내려가는데 같이 갈래요?’

그래서 그냥 따라갔어.”

엄마는 말을 맺었다.

“돌아가는 대신, 더 멀리 가보고 싶었거든.”


엄마는 도망친 게 아니라,

살기 위해 떠났던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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