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 끊긴 신호음, 10장
버스가 남쪽으로 달릴수록 창문 밖 풍경이 느려졌다.
논이 이어지고, 바람 냄새가 달라졌다.
엄마는 이상하게 마음이 가벼워 졌다고했다.
이 길의 끝에서 무언가가 바뀔 것 같은 예감에.
“해남에 도착해서 마을버스로 갈아탔거든.
동료들 집으로 가는 길이었는데,
그 버스에 뒷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남자가 올라탔어.”
엄마는 잠시 멈췄다.
“이상하게… 자꾸 눈이 갔어.
딱히 잘생겼던 것도 아닌데,
그냥… 이상하게 그랬어.”
“그 남자는 두 정거장 만에 내렸고,
엄마랑 동료들은 다섯 정거장을 더 가서 내렸어.”
"짐을 풀고 마당에 앉아, 시골개와 놀고 있었는데.
그때 동료가 말했어. ‘혜영아, 괜찮으면 아는 오빠 불러서 같이 저녁 먹으려는데, 괜찮지?’
엄마는 고개를 끄덕였다고 했다.
자기 집도 아니고, 신세를 지는 입장이었으니까.
‘그래, 마음대로 해.’
저녁 준비를 하던 중
누군가 마당으로 들어섰다.
엄마는 그 순간 숨이 멎는 줄 알았다고 했다.
낮에 버스에서 봤던 그 남자였다.
뒷머리를 묶은 채, 약간은 쑥스러운 표정으로 인사하던 사람.
“그 사람이… 너희 아빠였어.”
엄마의 목소리가 아주 조용했다.
“그날 저녁, 다 같이 밥을 먹고
너희 아빠가 올겐을 치며 노래를 불렀어.”
엄마는 잠시 눈을 감았다.
“윤복희의 ‘나는 어떡하라고’.
그 노래가 흘러나오는 순간,
가슴이 이상하게 저렸어.”
“그때 알았어.
공장에서 라디오 들으며 울던 그 노래가,
바로 이 노래였다는 걸.”
“그 노래가 그렇게 구슬플 수가 없더라.
그냥 뭐랄까... 목소리가 혼자 울었어.
“추석 연휴가 끝나갈 무렵이었어.
짐을 챙기고 있었는데,
너희 아빠가 그러더라.
‘금가락지 끼워 줄 테니, 나랑 살자.’”
엄마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 말을 듣고 한참을 가만히 있었어.
그래, 집도 나왔고 공장 일도 이제 지쳤다…
그런 생각이 들더라.”
“그때는 사랑이 뭔지도 몰랐어.
그냥 누군가 내 손을 잡아주는 게 좋았던 것 같아.”
“그렇게… 너희 아빠랑 같이 살기 시작했지.”
그 말은 오래 맴돌았다.
세상에서 처음으로 ‘머물고 싶다’는 마음이 들던 순간이,
엄마에겐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땐 엄마가 열여덟이었어.
너희 아빠는 나보다 조금 더 어른이었고,
오빠처럼 느껴졌지.
세상이 막막했는데,
그 사람 옆에 있으면 왠지 덜 무서웠어.”
“얼마 지나지 않아 배가 불렀고,
열아홉 겨울에 너희 형을 낳았어.
그때의 나는 아직 아이였는데,
이미 엄마가 되어 있었지.”
“그 시절부터, 너희 아빠는 술을 좋아했어.
일이 끝나면 올겐을 켜고
술을 마시며 노래를 흥얼거렸지.
그 노래를 들으면 마음이 따뜻했어.
내가 가지지 못했던 자유로움,
그리고 내가 반했던 그 목소리였으니까.”
“근데 어느 날부턴가, 이상하게 불안해졌어.
술을 조금만 마셔도 목소리가 달라졌고,
웃다가도 갑자기 소리를 질렀어.
기분이 좋을 땐 세상에서 제일 다정했는데,
그 다정함이 오래 가지 않았지.”
‘좋을 땐 그렇게 좋은데, 왜 갑자기 저럴까.’
“그게 그때 내 마음이었어.”
“그래도 떠날 생각은 하지 않았어.
열아홉의 나는,
사랑이란 게 그런 거라고 믿었으니까.
조금 무서워도 참고 견디면
언젠간 괜찮아질 거라고.”
‘삑삑삐–빅.’
“엄마, 저 왔어요.”
엄마의 얘기를 듣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던 내 옆엔
현서가 곤히 잠들어 있었고,
우리 형과 형수는 새벽 네 시가 되어 집에 들어왔다.
“영민이 왔니? 며느리도 고생했다.
몇 시간 못 자겠지만 얼른 눈 좀 붙여.
영락이도 이제 얼른 자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