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부 : 끊지 못한 사슬, 5장
작은방 서랍을 열자
예전에 쓰던 물건들이 있었다.
이제는 더 이상 쓸 수 없게 된 것들,
그리고
예전 휴대폰이 꺼진 채로 그대로 있었다.
충전기를 꽂아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잠시 그대로 두었다.
괜히 심장이 빨라졌다.
아빠가 떠난 뒤,
나는 슬퍼하기보다는
자꾸만 멈춰 섰다.
울지 못한 게 아니라,
어디서부터 울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미워했던 기억은 분명한데,
그 미움이 어디까지였는지도
이제는 흐릿해져 있었다.
이 휴대폰을
왜 아직 버리지 않았을까.
버릴 타이밍이
없었던 건지,
미뤄둔 건지,
아니면
일부러 남겨둔 건지.
충전기를 찾아 꽂았다.
나는 주방으로 가 컵을 꺼냈다.
물 대신 술병을 집어 들었다.
딱 한 잔만.
긴장만 좀 풀자.
나도 모르게
연거푸 두 잔을 마셨다.
술이 목을 지나갈 때
몸이 먼저 반응했다.
따뜻해지면서
생각이 느려졌다.
화면이 켜지기까지
몇 초가 걸렸다.
비밀번호를 눌렀다.
손이 익숙했다.
너무 익숙해서
오히려 겁이 났다.
사진첩을 먼저 열었다.
아빠는 없었다.
예상했던 결과였다.
통화 기록으로 넘어갔다.
아버지라고 저장된 이름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날짜와 시간만 적힌 파일 녹음 파일들이
줄지어 있었다.
보고 싶어서인지,
확인하고 싶어서인지,
아니면
기억을 다시 덮어쓰고 싶어서인지.
한 파일 위에
손가락을 올렸다가
내렸다.
술을 한 모금 더 마셨다.
그리고
가장 위에 있는 파일을 재생했다.
잠깐의 잡음 뒤에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막둥아.’
숨이 멎었다.
나는 다시
술을 한 모금 마셨다.
‘우리 막둥이,
요즘 잘 지내냐.’
술에 취한 목소리가 아니었다.
화를 누르고 있는 톤도 아니었다.
평소에 내가 알던
그 다정한 목소리였다.
‘아빠가 말이야,
갑자기 네 생각이 나서
전화했어.’
그 순간
방 안이 조금
작아진 것 같았다.
‘요즘 힘들지 않은지,
괜히 물어본다.’
웃음소리가 섞였다.
괜히 웃는 소리였다.
그때의 나도
웃으며 대답하고 있었다.
‘그래도
밥은 잘 챙겨 먹어라.’
나는 그 자리에 앉은 채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빠는
여전히 말하고 있었고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냥…
우리 아들 보고 싶어서.’
녹음 속 아빠는
나를 부르고 있었다.
내가 알던 이름으로.
내가 한 번도
거절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그제야 알았다.
내가 찾고 있었던 건
추억이 아니라
이 목소리였다는 걸.
아빠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확인하려고
여기까지 온 게 아니라,
이렇게도 말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부정하게 될까 봐
두려워하고 있었다는 걸.
‘막둥아.’
그 한마디가
내가 쌓아 올린 모든 말을
한 번에 무너뜨렸다.
나는 울지 않으려고
입을 다물었다.
두 번째 녹음.
‘야이 개자식아,
네가 그러고도 내 새끼냐?’
술이 한 모금 더 들어갔다.
혓바닥이 꼬여 있었고
말끝이 술에 젖어 있었다.
이 목소리는
너무 익숙했다.
문보다 먼저 들어오던 소리.
집 안을 채우던 소리.
잠들어 있던
미움과 분노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세 번째 녹음.
'응, 아들…
아빠 병원비가 없어서…
돈 좀 보태주라.'
그때의 나는
이렇게 말했다.
‘돈 보내줬었잖아.
그 돈은 어디다 썼어?
설마 또 술 마셨어?’
잠깐 숨을 고른 뒤
나는 말했다.
‘하… 진짜 짜증 나는 거 알아, 아빠?
나도 힘들어.’
그 대목에서
녹음은 끊겼다.
아버지는
병원이 아닌 곳으로 갔고,
나는 그 이유를
이미 알고 있었다.
결국 병을 키웠다.
휴대폰을 쥔 손에
힘이 빠졌다.
나는
세 번째 녹음을 다시 재생했다.
그리고
통화하듯
말을 이었다.
“응, 아빠.
내가 돈 꼭 보내줄게.
돈 걱정 말고
제발 치료받자.”
“그리고…
그 돈 다른 데 써도 괜찮아.
나 진짜 괜찮아.”
“그러니까…”
말이 엉켰다.
“그러니까
다시 와.”
그 말이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아빠는
대답이 없었고
화면은 이미
꺼져 있었다.
아빠는
이미 없었고,
나는 그 사실을
알게 된 것뿐인데,
몸은 처음 알게 된 사람처럼
무너지고 있었다.
나는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술병은 비워져 있었고
손은 떨렸다.
불 꺼진 화면에
내 얼굴이 비쳤다.
화면엔 아버지가 보였다.
그제야 울음이 나왔다.
참았던 게 아니라,
늦게 도착한 울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