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의 여행

초청13

by 다날

설거지하던 엄마가 다급하게 나를 불렀다.

싱크대는 이미 비어있었고 그릇들은 샤워를 끝낸 상태였다. 그렇다고 싱크대를 닦는 것도 아니었는데, 물은 계속 빠른 속도로 떨어졌다. 문제는 엄마도 같이 수챗구멍으로 빨려 들어갔다는 것이다.

오랜만에 셋이서 트레이더스를 갔다. 가족끼리 장을 보는 게 얼마만인지 카트를 끌고 있는 내 앞에 걸어가는 부부가 낯설었다. 예전에 한창 같이 마트를 다닐 땐 포지션이 달랐던 것 같지만, 크게 중요하진 않았다. 누가 카트를 끌고, 누가 물건을 담을지는 정해진 적이 없었지만, 얼핏 생각해 보면 지구력이 가장 강한 사람이 카트 담당을 하는 듯했다. 이제는 내가 키가 제일 컸다.

또 고민이 사라졌다.

보통 대형마트에서 쇼핑을 할 때면 그때그때 필요한 것들만 샀었다. 딱히 종이에 리스트를 적어온 건 아니었지만, 약속한 듯 필요한 제품만 카트에 담았다. 그래서일까, 가격과 유통기한도 철저히 비교하며, 다음 주엔 필요할 듯싶지만 당장 이번 주엔 필요하지 않다면 한참을 고민하다 결국 매대의 눈길을 무시했다. 다음 주에 또 오면 됐다.

트레이더스나 코스트코가 등장한 후로는 장 보는 속도가 달라졌다. 딱히 고민할 거리가 없었다. 한 종류의 상품을 대량으로, 하지만, 조금 저렴하게 살 수 있는 게 매력이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우리 집은 모두가 입이 짧아 식품 같은 경우는 빠른 속도로 지나칠 수 있었다. 한 종류의 음식을 여러 번 잘 먹지도 않을뿐더러, 다양한 종류를 대량으로 사게 되면 버리는 게 더 많을 게 뻔했다. 생명력이 길면서 매일 먹거나 쓸 수밖에 없는 녀석들만이 쇼핑 대상이 됐다. 물, 샴푸, 라면, 일회용품, 음료수, 달걀 정도 말이다.

정말 필요한 건 집에 대용량으로 있게 되는 순간부터는 자잘하게 갖고 싶거나 먹고 싶은 건 크게 생각나지 않았다. 그게 없어도 살아가는데 드는 불편함이 흐려지고, 그런 일상에 무언가의 결핍은 무더 졌다. 다음 장 보는 날은 쉽게 미루고 또 미루어졌다.

우린 저녁을 집에서 먹고 장을 보고 왔다. 안 그래도 식욕이란 씨앗은 키우지 않는 사람들인데 이미 밥까지 먹었으니, 사 온 물건들을 각자의 위치로 보내는 일에 충실했다. 음료수 하나 입에 대지 않았다. 냉장고 아니면 베란다 구석에 놓는 것이 전부였지만, 손이 많이 가는 녀석이 하나 있었다.

달걀은 항상 어딘가 불편해 보였다. 한 알 한 알 모두 자기 자리에 공평하게 앉아 있어 보이지만, 그래서일까, 그 모두 같음은 대단히 불안감을 줬다. 하나라도 자리에서 이탈하는 순간 질서와 균형이 무너지게 되는 모습이 이질적이었다. 유정란일 땐 더욱 그랬다. 왠지 꿈에서라도 닭 가족에게 사과를 해야 할 것 같았다. 당신의 병아리를 유괴하고 살해해서 미안했다, 그래도 또 낳으면 되니까 이해해 달라, 나만 그런 건 아니니까 너무 미워하진 말아 달라며 잠에서 깨고 싶었다.

유기견이나 유기묘를 지나치지 못하고 키우던 당신들의 알을 깨고 나온 씨앗이라 항상 저런 마음이었다. 물론 비건은 아니라 잡아먹는 것에 익숙하지만 동물원이 사라지는 세상을 꿈꾸는 사람이다.

아빠는 육십 알 짜리 달걀판을 식탁에 올렸다. 냉장고에서 달걀 전용 통을 꺼내왔다. 삼층짜리 미끄럼틀 모양이다. 삼층 꼭대기에서 하나씩 알을 굴리면 일층부터 차곡차곡 자리를 채웠다. 굴러가다 보면 불안한 구간이 있었다. 한층 내려올 때나 달걀끼리 서로 부딪힐 때 나는 소리에 눈을 뗄 수 없었다. 혹시나 깨지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처음 느껴진 시선이 거북했는지 알이 깨졌다. 한 번도 깨진 적 없어서 괜찮다고 호언장담하던 아빠의 표정도 금이 갔다. 깨진 달걀의 하얀 물이 순서를 지키지 않고 자기 멋대로 미끄럼틀을 탔다.

미끄럼틀 청소를 위해 알을 빼내는 작업은 쉽지 않았다. 뭐든지 중력을 역행한다는 건 삐그덕거릴 수밖에 없으니 그렇겠지 싶었다.


지겨워.

엄마는 굳이 또 설거짓거리를 만든다며 아빠에게 핀잔을 줬다. 아빠는 그 알은 이미 금이 가 있었다고 억울함을 호소했다. 변명은 아닌 듯했다. 미끄럼틀을 타던 중 깨진 달걀은 더 이상 없었다.



이것 좀 봐.

다행히 엄마는 수챗구멍에 완전히 빠지진 않았나 보다. 하지만 대체 음식물 쓰레기나 보라고 방에 있는 나를 부른 건 무슨 심보란 말인가.

가까이 와 보라니까.

알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노른자 하나가 수챗구멍 중앙에 누워 있었다. 아니, 왜 아빠한테 난 화를 나에게 푸는지 싶었다.


신기하지 않아?

대체 뭐가?

이 알 좀 봐. 이렇게 세게 물을 틀어놨는데도 안 깨진다?

엄마는 물을 껐다가 틀기를 반복했다. 물줄기가 노른자에 떨어질 때 모양은 슬라임이 마구잡이로 모습을 변태 하는 것과 비슷했다. 그러다 물을 끄면 다시 탱탱한 노른자로 돌아왔다.

신기했다. 신기하긴 했지만 이게 그 표면장력인가 뭔가 하는 과학적 사실에 불과한 것 아니던가 싶었다.

표면장력 그런 건가 보네. 이게 그렇게 신기해?

아, 물론 과학적인 이유가 있겠지. 그래도 신기하잖아. 어떨 땐 되게 단단해 보이면서도 이렇게 쉽게 껍질이 부서지는데, 또 이렇게 버티는 게.

싱싱한 알이라 그런가 보지.

아빠가 통명스러운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엄마는 이미 노른자에 잠수되어 헤엄치는 중이었다.

알이란 건 다 똑같나 봐. 어떻게든 버티는 게, 고생해서 태어나서 쉽게 죽지 않는 게. 사람이랑 똑같아.



너도 저렇게 내 뱃속에서 나왔겠지? 고생했겠어.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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