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바라기의 등

초청23

by 다날


어쩐지 해바라기는 어디에서 만나나 고독해 보였다.


다른 꽃에 비해 큰 머리, 환한 노랑 빛은 마치 태양 같지만 이상하게 외톨이 같았다. 그것도 아주 욕심 많고 자기만 잘난 줄 아는. 실상은 모두가 자기를 피하는 것인데, 고귀한 척 수준이 안 맞는 것들과는 내가 멀어져야지 하고 혼자가 된 모습에, 현학적인 철학자가 서 있는 듯싶었다.


그간 나의 오해가 깊었나 보다.



그러나, 그런 모습이 안타까워 꽃집에 들어서면 해바라기부터 찾았다. 대체로 잘 보이지 않았다. 철이 있다고는 하는데, 언제는 있고 언제는 없으며 어느 날은 사장이 아껴뒀다며 생색을 낼 때까지 물어야 비로소 몇 송이 꺼내왔다.

그렇다고 온전한 동정만으로, 친구를 만들어 주자는 마음만으로 해바라기를 좋아하는 건 아니었다. 어쨌든 바라보면 기분이 좋아졌으니 말이다. 또 꽃은 선물할 때만 샀기에 더욱 매력 있었다. 왠지 꽃이 아닌 해를 주는 듯했다. 해바라기는 들고 있는 사람의 얼굴에 조명을 내리쬐었다. 꼭 꼴이 태양이 거울을 보는 듯했다. 이름 따라 하도 많이 바라봐서 수많은 햇볕을 머금어서였을까.



재작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빈 센트 뮤지엄에서 해바라기를 또 만났다. 평소 보던 것과는 물론 색도 형태도 달랐다. 누구나 아는 그 그림, 꽃병에 꽂혀 있는 몇 송이의 해바라기, 실물을 봤을 때도 적당한 우울감으로 고독해졌다.

아래층의 자화상부터 보며 올라가서 그랬을 수도 있다. 워낙 가난했던 작가가 어렵사리 그려서만은 물론 아니었다. 물감을 살 돈이 없어 동생 테오에게 돈을 빌려다 그림을 그렸다고 했다. 뮤지엄에 전시된 테오와의 편지를 보면, 참 형편없는 형처럼 느껴졌다. 나아가 현실은 모르고 자기만을 위해 타인을 희생시키는 존재로까지 보이며, 정이 약간 떨어지기도 했다. 생계는 유지하면서 예술을 했어야지, 이런 사람은 되지 말아야지 속으로 다짐하며 말이다.


하지만 그의 작품들을 보면 볼수록 묘한 감정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멸시와 비난이 경외로 바뀐다고 하면 될까? 돈을 벌 수 있는 낮, 그러니까 해가 떠 있을 땐, 반드시 그림을 그려야만 했다. 초 하나 살 돈이 없었기에 날이 어두워지면 그는 그림을 그릴 수 없었다.

무엇을 좋아한단 건 그런 걸까, 아니 무엇을 미친 듯이 좋아하는 사람은 결국 혼자가 되며 세상의 수레바퀴로부터 분리될 수밖에 없는 걸까, 왠지 모르게 그 공간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짠함이 느껴졌다.

그래서 해바라기를 보면 시기와 푸념 사이의 줄다리기가 시작되나. 어떤 꽃보다 크게 해를 머금어 반짝 빛나는 금싸라기가 어쩐지 미우면서도 불쌍했다. 어쩌면 해바라기는 해바라기로 부르기 전부터 해를 바라봤을지도 모르겠다. 결국 해바라기는 태초부터 안은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는 것뿐 그 외의 욕심은 그를 바라보는 존재의 것일지도 모른다. 고흐가 화가 빈센트 반 고흐여서가 아니라, 단지 그림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여전히 햇볕을 독차지하는 듯한 큰 얼굴이 반갑지만은 않았다. 양보와 절제가 기를 쓰고 강조되는 요즘 사회에서 남들보다 지나치게 큰 크기의 소유는 미움받을 준비의 다른 말이 됐다. 어떻게 그것들을 가졌는지, 어떻게 그것들을 사용하는지 보다 그것들을 갖고 있단 사실만이 중요해졌다. 그런 면에서 해바라기는 이기적인 놀부에 불과했다.



그러나 또 여전히 그 모습이 미운 것만은 아니다. 미워하는 마음의 기조가 열등감이나 상실감이라면, 동정하는 마음은 해바라기의 줄기로부터 출발한다.


얼마 전, ‘광합성 인간’이란 책을 읽었다. 생명체의 생체리듬에 대한 내용을 여러 실험 사례로 설명한다. 나에겐 단연 해바라기가 독보적으로 눈에 띄었다. 그중에서도 줄기에 대한 비밀에 꽂혔다.

생각해 보면, 대가리가 큰 꽃이라며 욕심쟁이라 비난했던 적은 많았으면서, 한 번도 그 큰 대가리가 부러지지 않고 서 있지란 고민은 해 본 적이 없었다. 그저 인공위성이나 태양광 패널처럼 빛을 많이 흡수하기 위해 대가리를 넓혔겠지란 추측뿐이었다.


비밀은 줄기에 있다. 그리고 그 비밀은 참으로 슬펐다.


해바라기의 줄기는 크게 두 개로 나뉜다. 앞과 뒤로 말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해를 보는 방향과 해를 등지고 있는 방향으로 분리된다. 보기엔 하나지만 역할이 다르다. 해를 마주하는 쪽의 부분이 햇볕을 통해 성장할 때 뒤쪽 줄기는 커가는 무게를 지탱해 준다. 반대로 해가 중천에서 서쪽으로 넘어가기 시작하면 그 둘의 역할은 바뀐다. 그러면서 해가 움직이는 방향으로 머리가 따라가며 흔들리는 것이었다.

낯설었다. 매일 적어도 한 번은 다른 녀석을 위해 그늘진 인생을 살고 있음이 지나치게 이상적으로 보였다. 물론 결국 해바라기란 하나의 존재로 본다면 모두 이득을 취하는 꼴이지만, 우리는 그래 본 적이 있나 싶었다. 단편적으로 작은 사회 하나가 잘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그것을 하나로 여기고 타인의 그늘을 버텨준 적이 있던가, 잘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니다. 진짜 비밀은 지금부터다.


해바라기는 성숙기에 접어들면, 그러니까 어른이 되면, 흔들기를 멈춘다. 성장한 서로의 무게를 충분히 버텨줄 수 있는 힘이 생긴 이후론 해를 따라가지 않는다. 항상 동쪽에 시선을 고정한다. 결국 어른이 된 해바라기는 언제나 석양을 등지고 서 있는다.

소름이 돋았다. 마치 뮤지컬 커튼콘을 보는 듯한 전율을 느꼈다. 그만큼 멋졌다. 멋있다, 멋있다, 한참을 여운에 빠져 읊조렸던 것 같다. 해바라기가 된 내 모습을 상상했다. 이른 새벽까지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어둠을 바라보며 해를 기다리고, 동이 틀 무렵 어떤 목적도 없이 그것만을 기다렸기에 그것을 바라보기만 하고, 금세 내 시야에서 사라지는 따뜻함을 등 뒤로 양보하며, 가장 아름다운 황혼의 유혹에 빠지지 않고 가장 먼저 그늘에 들어가 저들에게 미소를 띠는 그런 영화 같은 모습으로 말이다.



옳은 신념이 욕심이 되고 아닌 꿇음이 양심이 되는 세상에 일조하지 않는 사람, 이런 이유로 고독한 거라면 얼마든지 버텨낼 수 있는 해바라기 같은 사람, 또 그런 세상.


석양 아래 들판에서 각자 한 곳만을 바라보지만, 해바라기들처럼 그게 함께면 꽤나 외롭지 않을 것 같았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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