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청24
원래 버스를 타면 창가에 앉았다. 풍경은 가속되고 멈추기를 반복했다. 그때마다 저 사람은 왜 저렇게 걸을까, 저 건물은 페인트 칠 좀 해야겠다, 저 나무가 저렇게 컸나, 구름의 두께와 각도가 하늘에 적절한가, 같은 소심한 질문들이 쏟아졌다.
하나의 평면이었다. 조합이 필요했고, 방법은 자유였다. 한 곳만 응시해도 버스의 속도에 맞춰 여러 면으로 분할됐다. 인간인 나도 세상도 삼차원적이지만, 분명 동일한 능력의 존재는 아니었다. 어디서든 어떤 대상이든 한 번에 전체를 인식할 수 있는 경우는 없었다.
그것이 내 능력의 한계라면 한계이고, 자연에 일부에 불과한 운명 때문이라면 그런 것이겠지. 부족하고 하등한 것은 맞지만, 그게 평면을 조합하면 안 되거나 할 수 없는 이유는 아니라 생각했다.
그래서 재밌었다. 또 오히려 그렇기에 조합할 수 있는 자유를 가졌다고 느꼈다. 어차피 내 상상 속에서만 나타나는 모습이라 눈치 볼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버스를 타면 복도 쪽에 앉고 있다.
조합에 재미가 사라져서 창가를 멀리 하는 건 아니었다. 그것은 나만의 자유가 아니며, 모두가 누리는 것이라 가치가 떨어진다, 그것을 멋진 일이라 사고하는 건 하등한 존재의 열등감에 불과하다, 단지 스스로 위안을 삼고 싶은 것뿐이다, 누군가 나에게 압박하는 듯했다. 결국, 재미를 의식적으로 없애야 했다.
남은 것은 조급함이었다. 창가보다 복도 쪽 좌석은 적어도 한쪽 다리를 보다 뻗을 수 있어서 육체적으로는 여유로웠다. 하지만 쭉 뻗은 다리의 끝은 하차문과 바로 위의 노선도에만 반응했다.
애초에 목적지를 정하고 버스를 탔다. 하루이틀 타는 버스도 아니다. 눈을 감고 귀를 막아도 감각적으로 내려야 할 정류장은 느낄 수 있다. 그런데 정류장 안내가 나올 때마다 다리가 털리 듯 움찔거렸다. 괜히 방향이 맞는지, 아직 안 지나쳤는지, 얼마나 남았는지 계산밖에 할 줄 모르는 계산기가 됐다.
여기서 조금 솔직해지면, 복도를 선호하는 나를 발견할 수 있다. 정확히 말하면, 그 이유를 바라볼 수 있다.
내릴 때 빨리 내릴 수 있다, 그게 전부다.
빨리 내리면 무엇이 좋은가. 내리기 위해 옆 사람에게 양해를 구하지 않아도 되고, 최초는 내가 되고, 내린 세상의 신호등을 가장 먼저 건너는 자가 되고, 최대 오 분 정도 다음 세상을 점령하는 기분 말고는 잘 모르겠다.
이게 조합하고 상상하는 낭만과 자유를 버려야 하는 합리적 이유가 맞는가. 평생 뒷면을 보지 못하고 사는 게 이기는 건가. 모두는 내 뒷모습을 볼 수 있는데, 나는 그것을 보지 못하면 오히려 손해 아닌가. 뭐라고 욕하는지도 모르고 욕만 내뱉는 존재가 최종 승리자가 되는가.
그러면서, 달의 뒤편을 찍고 싶어 안달 난 인간은 너무 모순적이지 않나.
달리는 버스가 삶이고 하차가 죽음이면, 언제 죽어야 하는지만 맹목적으로 바라보는 바보가 된 것이다. 또는 언제 죽을 수 있는지 나와는 상관없는 노선도에게 묻는 천치가 된 것이다.
심지어 빨리 죽으려고 노력하는 이상한 자로 둔갑하게 된다. 나는 시작도 끝도 없는 순환버스에 타고 있는데 말이다.
멀미 좀 더 해도 되지 않나,
재밌을 지도 모르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