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서 좋아요

초청22

by 다날


따라오라 한 적 한 번 없는데, 막상 금세 따라오지 않으니 한참을 끊긴 발자국을 바라보게 됐다.

몇 자취 안 되니 지울까 아니면 똑같이 그릴까, 그건 너무 없어 보이니 새로운 발자국을 찾을까.

좋아서 좋아요, 한다고 생각하는 건 세상을 모르는 미련한 사람의 착각일까 싶었다.



뇌리 답을 찾을수록 잘못을 저지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신분이 없다는 세상에서 일방적으로 따른다는 건 불가능하기 때문인가. 먼저 따르겠다 추파를 보냈다면, 당연히 나 또한 그를 따르겠다고 약속해야 했나. 그때 비로소 공평하고 안정된 저울이 완성되는 것인가.

너무나 유치하고 치졸한 미움인 듯하여 잊고 싶었지만, 받은 팔로워에 팔로잉하지 않은 게 어떤 죄목인지 알고 싶었다. 좋아하고 따른다는 마음이 그렇게 쉽게 생겨나고, 단잠 한 번에 꿈처럼 날아갈 수 있을까, 나는 무척 어려웠는데 말이다.



최근에 영화‘왕과 사는 남자’가 흥행하면서 단종이 웃는다. 엄흥도는 좋은 사람으로 사랑받는다. 이홍위는 엄흥도에게 따르라 한 적 없지만, 그는 목숨 바쳐 따른다. 따르는 것은 죽음이니 따르지 말 것을 명해도 그는 의지를 결국 굽히지 않는다. 이홍위 또한 그 마음의 깊이를 헤아릴 줄 안다. 영화관을 나오면서 대다수는 둘 모두를 좋은 사람으로, 한명회와 세조를 나쁜 악마로 그린다.

어학적 의미로 접근하면 상당한 모순이다. ‘좋음’이란 본디 ‘고귀한’, ‘귀족적인’이란 의미를 지녔다. 동시에 ‘나쁨’은 ‘평민적인’, ‘저계급한’이란 뜻으로 시작됐다. 그 사이에서 전자는 특권을 지닌 영혼으로 나아갔다. 오늘날엔 형이상학적 개념으로 그 뜻이 확장되어 바뀌었지만, 이홍위와 엄흥도는 조선 전기에 살았다.

즉, 좋음과 나쁨이 서로 맞나 하나의 좋음으로 융합됐다. 이것은 새로운 좋음이다. 그러나 단지 단어 두 개가 합쳐지는 것처럼 두 사람의 마음이 가벼웠는가 떠올려 본다면, 절대 아닐 테다. 수없이 고민하며, 미워하고 증오하다 그리워하며 기다리고, 실망하고 후회하다 연민하고 동정했음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이 ‘좋음’은 요즘 같은 권력의 지표가 아니었으니까.



그게 부러웠다.

한편으론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직 많은 사람들이 ‘좋아요’와 ‘팔로워와 팔로잉’처럼 사람을 여기진 않는구나 싶었다.



또 하나 배웠다.

따라오라 하지 않아도 따른다는 건 우선 큰 결심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팔로잉해 주지 않는다고 팔로워를 끊은 사람을 잠시나마 미워했던 건 내가 부족한 사람이라는 반증임을. 어쨌든 먼저 좋다고 인사한 것은 사실이니까. 이홍위만큼 상대방의 마음에 충분히 감사하지 못했다.

반면, 좋아하고 따르는 마음이 기브 앤 테이크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은 아니란 확신을 가졌다. 분명 글이든 사진이든 사람이든 처음에 좋아하게 되는 이유는 있을 테다. 그러나 그 이유를 상대방에게 강제해서는 안 된다. 그 이유가 그것 자체에 없다면 더욱이 말이다.

좋아하는 마음이 식을 순 있지만, 양은 냄비 식듯 차가워진다면 아직 서로가 부족한 것이겠지. 그것에 충분한 시간과 노력을 쓰지 않았고, 반대로 그 사람이 결심하기까지의 고민을 쉽게 생각하여 진심으로 기다려주지 못한 것이겠지.



좋아요와 팔로워를 신경 쓰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지만, 이홍위와 엄흥도의 ‘좋음’으로 글을 쓰려한다. 또 읽으려 한다. 이런 마음으로 사람도, 세상도 좋아하고 싶다.



또 어느 순간엔

그 글을, 그 사람을 왜 따릅니까?라는 물음에

좋아서 따릅니다.

어떤 점이 좋은가요?라는 질문에

좋아서 좋아요.

진심이 섞이는 세상을 자주 들을 수 있겠지.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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