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굿이 뭐 좋다는 거 알겠다. 그럼 굿하면 뭐든지 다 풀리겠네? 그런 생각은 오산이다. 병에 한 번 비유해 보자. 세상 모든 병을 한 번에 고칠 수 있는 만병통치약은 없다. 병에 따라 맞는 약은 따로 있다. 그래서 우리는 아프면 병원에 가고 의사의 적절한 처방에 따라 맞는 약을 먹는다. 굿도 그렇다. 아픈 건 고민이 있는 상황이고 병원에 가서 의사에게 진단을 받는 건 무당과 이야기를 나누는 일과 같다. 굿을 해야 할 상황이면 굿을 하는 것이고, 굳이 필요 없으면 이야기를 나누며 해결책을 찾기도 한다.
특이하게도 이해경 선생님은 자신을 찾아온 사람들과 이야기 나누는 과정을 상담이라 말한다. 그리고 실제 상담 과정과 비슷하다. 우선 이야기를 충분히 들으면서 상대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도록 지켜본다. 넋두리 속에 해결책이 있다고, 그러다 보면 기적처럼 의뢰인 스스로 해결책을 찾을 때도 있다.
무당한테 사람들이 온다는 거는 미래에 대한 궁금증 때문에 오는 경우도 있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위안을 받으러 오는 거야. 내가 항상 하는 얘기는 그거야. “논리와 이론을 앞세워서 사람을 접하지 마라.” 그러면 교과서적인 이야기 밖에 안 되고 그 사람의 심리 속으로는 들어갈 수가 없는 거야. (…) 어떤 사람은 정신병원에 갈 필요가 없어. 나하고 수다 떨다 보면 자기 스스로가 정리가 돼. 넋두리 속에 해결책이라는 게 그런 거야.
넋두리를 해도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때, 그다음은 도장 깨기다. 자신의 장단점을 솔직하게 적고 단점을 하나씩 고쳐나가는 거다. 이른바 가치관 바꾸기. 삶이 힘들어 무당에게 찾아오는 사람들은 모두 절박한 이들이다. 자신이 할 수 있는 한에서 최선을 다해 아등바등 여러 방법을 취해도 해결되지 않으니 무당을 찾아온다. 다시 말해 무당을 찾아온 이는 20살이나 50살이나 그 사람이 처한 환경의 결정체인 셈이다. 가치관을 바꾸라는 선생님의 말은 지금까지 했던 방법이 먹히지 않으니 익숙한 방법에서 벗어나 다른 방법을 찾아보라는 조언이다.
아무리 운이 좋고 사주가 좋아도, 스스로가 변하지 않으면 제자리야. 운이 많이 들어오면 뭐 할 거야. 본인이 변하지 않고 그대로인데 운이 들어온다고 그게 받아주나? 그 운도 준비된 자가 잡을 수 있어. 피해의식에 찌들면 무슨 준비를 하겠어? 생각을 바꿔야 해. 일이 안 풀린다고 다 귀신의 조화가 아니야.
무당은 해리포터가 아니다. 신의 목소리를 전달해주는 사제이지 마법을 부리거나 하늘을 날 수는 없다는 말이다. 무당은 인생의 선배로서 지혜를 전해주는 자이다. 자신이 겪은 인생의 굴곡으로 찾아온 이의 마음 깊은 곳 뭉쳐진 한을 풀어주는 존재이다. 굿 또한 마찬가지다. 굿이 사람을 찾아오는 불행을 모두 막지 못한다. 대신 인생의 폭풍우를 함께 하는 우산은 되어줄 수 있다.
굿은 우산과 같은 존재야. 우리가 우산 쓴다고 비 안 맞니? 좀 덜 맞지. 방어와 보호의 역할을 하는 거야. 나한테 나쁜 일이 오지 말라고 평안과 위안을 비는 게 굿이잖아. 교통사고가 나서 다리를 잘라내야 하는 액운이 있는 사람이 살짝 긁히고 끝나는 걸로 해주는, 그런 효과란 말이야 굿은. 원천 봉쇄는 안 돼. 30년 동안 무당일을 하면서 깨달은 건 겪은 일은 다 겪어. 그걸 어떻게 겪냐의 차이지.
큰 무당을 ‘만신’이라 부른다. 만신은 손님을 많이 받아 돈을 많이 버는 사람이 아니다. 많은 사람의 속을 알 수 있고 인간의 치부와 실수를 보듬어 줄 수 있는 게 만신이다. 만신은 개인이 가진 치부로 인해 생기는 상처, 실수로 생기는 상처, 사람에게 받은 상처 이 모든 것을 공감하고 어루만질 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지금 당장 힘들고 배고픈 사람에게 비빌 언덕이 되어 주는 것, 나아가 가능하다면 지금 힘든 문제를 달리 생각해볼 수 있게 가치관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이 상담의 최종 목표이다.
만신은 아주 가까운 친구야. 오롯이 단둘이, 방해받지 않고 만나서 이야기할 수 있는 상대가 만신. 그러니 만신이 얼마나 공부를 많이 하고 생각을 해야 해. 끊임없이 생각하고 사람의 내면을 살피고 경험하면서 고민해야 해.
굿을 너무 좋게 포장하는 게 아니냐 의문이 들 수 있다. 세상에 돈 욕심 부리는 무당과 굿이 얼마나 많은데 무슨 말도 안 되는 교과서 같은 이야기만 늘어놓는다 생각할 수 있다. 나 역시 굿이 점잖지 않고 속되다 여겼기에 충분히 공감한다.
속되다는 표현에 대해 살펴보자. 속되다는 말에는 ‘천하다’와 ‘세속적이다’라는 의미가 포함된다. 쉽게 말해 돈 밝힌다는 소리다. 굿 공연을 보러 갈 때면 지도교수님께서는 상에 정성을 많이 보여야 한다며 항상 지갑을 두둑이 챙기셨다. 굿이 진행되다 보면 무당이 어딘가 허전하다며 직접 상에 돈을 올리라는 정성을 유도하기도 힌다. 나는 그게 너무 노골적이라 거부감이 들었다. 속된 건 그뿐만이 아니다. 굿에서는 개인의 욕망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무당을 찾아와 돈을 많이 벌고 싶다 말하는 사람이 많았던지 돈을 많이 벌게 해달라는 재수굿이 따로 있을 정도이다. 내가 아는 세상 종교 중에 이렇게 대놓고 욕망을 드러내는 종교가 없다.
다른 종교에서는 욕망은 죄라는데. 불교는 욕심을 비우라고 하고 천주교나 개신교는 성사 하면서 스스로 가졌던 욕망을 털어놓고 죄를 비는데, 굿은 대놓고 돈 많이 벌게 해달라 하니 뭐 이런 종교가 있나 싶을 수 있다.
굿은 나 편하자고 하는 거야. 살아있는 사람 편하자고. 욕심 못 내려놔. 당장 입에 들어가는 게 없는데 어떻게 살아. 굿에서는 인간의 탐욕과 욕망을 표현할 수 있게 해. 그래도 괜찮다고 하면서 스트레스 풀 수 있게 해줘. 그런 적나라한 인간의 욕망, 성욕, 물욕을 다 굿에서 해학적으로 풀어내는 거야. 거기서 자기 분수를 알게 해주는 게 굿이야. 자기가 평생 가지고 살 수 있는 그릇의 크기를 알게 해주는 게 무당이고 굿이라고.
무속에도 죄가 있어. 무속에서 기도할 때 ‘비나이다, 비나이다’하는 게 원하는 건 비는 게 아니라 잘못을 비는 거야. ‘내가 잘못했어요. 비나이다, 비나이다, 아둔해서 몰랐습니다. 인간이 미련하고 아둔해서 신명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욕심만 부렸습니다. 용서하시고 지금이라도 잘 알려주세요.’ 하는 거야. 죄가 있긴 한데 죄의식에서 좀 자유로운 거지.
생각해보면 나라고 뭐 그렇게 고상한가. 지금 이 글 쓰는 것도 다 먹고 살자고 하는 건데. 다른 종교는 또 얼마나 고상한가. 아닌 척 하면서 뒤로 요구하는 것보다 노골적으로 인간의 탐심 다 드러내놓고 주거니 받거니 하는 게 훨씬 인간적이다. 그리고 무당은 뭐 땅 파서 생활하나 자기들도 먹고 살아야지. 지원도 안 나오는데 노력한 만큼 대가를 받는 게 뭐 그렇게 잘못이라고 삐뚤어진 시선으로 바라보았는지 모르겠다. 우리는 이렇게 솔직함을 추구하는 민족이었는데, 언제부터 거절과 겸손이 미덕이 된 것일까 속상하기까지 하다.
굿이라는 게 ‘신령님, 나 저거 갖고 싶어요. 저거 주세요. 근데 신명의 뜻이 아니면 포기할게요. 근데 그럼 다른 거 주세요. 저거 못 받으면 다른 거 주세요.’ 이런 거야. 그냥 다 드러내면서 풀어지고, 맺어지는 거.
무당은 인생의 아주 가까운 친구이고 굿은 폭풍우 치는 인생길의 우산이다. 무당과 굿이 내 빽인 셈이니 세상만사 힘든 일도 조금은 잘 헤쳐나갈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