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태어나 처음으로 굿을 본 것은 지금으로부터 몇 년 전 서울 남산 국악당에서이다. 아무것도 모르고 선배들을 따라간 공연장 객석에서 창에 꽂은 돼지머리와 방방 뛰는 무당의 춤사위를 신기하게 구경했다. 점점 분위기가 달아오르자 무당 두 분이 장구와 북을 연결한 무언지 모를 커다란 덩어리를 가지고 나왔다. 덩어리는 무대와 멀리 떨어진 객석에서 보기에도 무거워 보였다. 태평소, 장구, 징 소리가 시끄럽게 울려 퍼진 후에 무당은 이빨로 그 덩어리를 들어 올리더니 무대를 이리저리 오갔다.
나는 그 모습을 보다 옆자리 선배에게 귓속말로 물었다. “굿이 차력이랑 다른 게 뭐예요?” 선배는 대답했다. “굿에는 신성함이 있지.” 이빨로 무거운 덩어리를 들어 올리는 게 신성함이라니 나는 그 말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관객들이 우르르 객석에서 나가 상에 오만원 짜리 지폐를 올리고 절하는 행동도 어딘가 이상했고 그런 정성을 유도하는 무당의 행동도 이해되지 않았다. 점잖지 않고 속된 것, 그게 내가 굿과 무당에 가진 첫인상이었다.
우리가 영화나 드라마에서 접하는 굿과 무당의 모습도 내 첫인상과 다르지 않다. 무당이 등장하는 영화 중 95%가 미스터리 장르이고 이들은 주로 밤에 피와 함께 등장한다. 함께 하는 소품도 강렬하다. 작두, 방울, 부적, 칼, 죽은 돼지나 닭. 진한 화장과 화려한 복장은 필수이고 소리 지르는 장면도 빠지면 섭섭하다. 항상 화가 나 있고 무언가 꿍꿍이가 있다. 그들이 벌이는 굿의 대부분은 목적이 불순하다. 누군가를 죽이거나 살을 날리거나 한다. 그 모든 행위의 종착지는 언제나 돈이다. 그것이 알고 싶다는 프로그램에도 무당이 한 집안을 파멸로 이끈 사연이 종종 소개된다. 정말 점잖지 않고 속되다. 사람들의 시선이 곱기 힘들다.
나만 그런 생각을 가진 건 아닌가 보다. 무당의 사연을 듣다 보면 그들의 마음에 남은 흉터를 마주하게 된다. 사람들의 편견 어린 시선이 만든 상처다. 무당을 찾아온 사람 중 일부는 갑질을 한다. 아무 말도 없이 어디 얼마나 용한지 보자는 태도로 무당의 영검을 시험하는 사람도 있고, 굿을 했는데 소용이 없다며 돈을 돌려달라는 사람도 있다. 집안에 문제가 있어서 몰래 무당을 찾아왔다가 나중에 가족들이 이를 알고 발길을 끊으라며 화를 내서 그 뒤로는 못 오는 사람도 많다. 무당이 무슨 불가촉천민인 것도 아닌데.
무당들은 스스로를 ‘어쩔 수 없는 무당 팔자’라 부른다. 무당으로 30년을 산 전문가가 되어도 어디 가서 인정받지 못한다. 한 분야에서 30년이면 공로상을 받아야 할 텐데, 공로상은커녕 공식적인 자리에서 아는 사람을 모른 척할 때도 있다. 사람들의 시선 때문이다.
“지금도 나는 상담 오는 사람들 시간 안 겹치게 시간 잡고, 굿할 때도 숨겨. (상대가) 사회적인 위치가 있잖아. 지금 시대가 어느 때인데 저런 미신을 믿어서 무당을 찾아가냐 소리를 들을 수 있으니까 숨겨. 어쩌다 행사에 얼굴을 비추면 인사만 하고 와. ‘저 무당이 왜 여기에 왔지? 집안에 무슨 일 있나?’이런 생각을 할 수 있잖아. 다른 사람 앞에서 아는 티를 내야 할 때도 나와.”
굿이 차력과 다른 게 무어냐는 나의 질문은 사람들의 편견 어린 시선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나와 같은 시선을 가진 사람들이 많아서인지 굿이 자꾸 사라진다. 요즘은 공개적으로 굿을 볼 수 있는 곳이 공연장밖에 없다. 개인적으로 여는 굿은 사람들 시선을 피해 비밀로 열린다. 공연은 굿과 형식은 같으나 의뢰인(문제가 있어서 굿을 여는 사람, 단골이나 재가집이라고도 부른다)이 없다는 게 다르다. 굿의 핵심이 되는 무당과 단골의 관계가 없으니 춤이나 무대 장식 같은 형식이 점점 도드라진다.
무당과 의뢰인의 관계는 굿과 차력을 구분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그 관계에서 신성성이 나오기 때문이다. 굿이란 본래 나를 찾아온 상대의 고민에 진심으로 귀 기울이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다. 의뢰인의 고민과 비슷한 신을 모시고 그 신에게 간절히 기도하면서 문제가 해결되기를 바란다. 새파란 날이 선 작두에 오르는 건 지금 이 공간에 신이 내려왔음을 증명하는 표현이다. 신이 내려와 너의 고민을 살피고 있다는 신호인 셈이다. 그 간절한 마음을 빼고 무거운 물건을 들고 작두에 오르는 행동에만 주목하면 안 된다.
굿에는 일정한 절차가 있다. 예배나 미사 보듯이 순서가 정해져 있어서 이 순서를 따라야 한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굿을 하는 마음을 풀어내는 일이다. 가정을 평화롭게 해달라거나, 아들을 낳고 싶다, 죽은 가족을 위로하고 싶다 등의 핵심. 그 핵심을 잘 풀어내야 좋은 굿이 된다. 상대에게 필요한 신을 잘 찾고 소통해서 가려운 데를 긁어줘야 한다. 신이 인간을 사랑하는 마음을 받아서 무당이 ‘네 심정을 내가 안다’를 전해주는 일이 굉장히 중요하다.
개개인이 하는 굿을 봐야 해. 거기서 나오는 야릇하고 신묘한 감정을 봐야 해. 자연적으로 분위기 안에서 생성되는 묵혔던 감정을 쏟아붓는 그 장면. 굿을 의뢰한 사람이 무당과 공감돼서 한풀이가 되는 과정을 봐야 한다고. 그게 굿의 역할이라고. 카타르시스를 느낄 정도로 쏟아져 나오는. 하루종일 굿 의뢰인과 무당이 눈을 맞추면서 문제점을 풀어내는 과정이 진짜야. 근데 그 교감이 행해지지 않는 굿이 많다는 말이야.
이 교감은 신명과는 다른 거야. 재가집(의뢰인)의 간절함이 무당에게 전해져서 대신 그 간절함을 신에게 전해주는 그 느낌. 사람들끼리 교감하는 거랑 무당이 재가집이랑 교감하는 건 진짜 다른 거야. 사이에 신이 있으니까. 근데 그게 이뤄지지 않는 진정성 결여의 굿이 요즘 너무 많아.
굿에 대한 내 생각은 석사 논문을 쓰면 바뀌었다. 굿의 원리와 무당의 역할을 자세히 공부하다 보니 그때의 질문이 부끄럽기까지 했다. 이제는 굿을 제대로 보고 그 울림을 느껴보고 싶은데 코로나로 있던 굿도 사라져 쉽지가 않다. 굿은 사라지는데 미디어 속 굿과 무당은 더 악독해져서 걱정이다. 이러다가는 정말 무속이 건전하지 못하고 요사스러운 사도(邪道)가 될 것 같다. 이 글은 더 늦기 전에 무속의 진심을 전하고 싶은 나의 노력이다.
굿이 차력과 다른 점은, 그 속에 이해와 교감과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무속에서 말하는 신성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