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간 가까이 예쁘게 머리부터 발끝까지 꽃단장을 했다. 친구를 만나겠다고 새로 산 짧은 청스커트를 입고,열번은 더 거울을 보고 난 후 주말에 집을 나섰던 그 당시 6학년. 꽃다운 나이 13살이었던 나.
5층짜리 아파트를 걸어 내려와 게이트를 나선순간 맑디맑은 하늘에서 갑자기 내 머리위로 떨어진 엄청난 물세례.
말 그대로 마른하늘에 날벼락.아니 물벼락.
으아아아악! 차가워! 어억! 으아앙~엉엉엉.. 엄마~~
정확히 5층에서 쏟아부은 빨간색 우리집 양동이 물을 전부 맞고 쫄딱 비 맞은 생쥐꼴이 된 난 엉엉 울면서 그 길로 다시 되돌아서 물을 뚝뚝 흘리며 집으로올라갔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날 그렇게 기분 좋게 외출하는 내가 유난히 꼴 보기 싫었나 보다. 그 사건의 주인공은 바로 3살 터울인 나의 친오라버니. 문을 열고 들어서니 벌써 현관 앞에서 하하하 푸하하 크크크. 화가 난 처참한 내 모습을 신나게 웃으며 자신의 장난이 통쾌하게 100프로 성공했음을 그렇게 표현하던 그. 물론 뒤이어 엄마에게 그 사실을 이르고 오빠는 혼나고, 난 다시 온몸을 닦고, 옷을 갈아입고, 약속시간에 늦고(그 당시엔 핸드폰도 없었다)등등이 이어졌다.
우린 어릴 때부터 그렇게 책에 나오는 이상적이고 사이좋은 오빠와 동생사이가 아니었다. 찐현실남매.
오라버니는 장남에 7대 장손. 난 공부부터 시작해 무엇하나 오라버니와 비교해 잘나지 못한, 오히려 건강이 약한 편인 평범한 여동생이었다. 하지만 딸바보 아빠가 내편이었고 그것이 또 오라버니의 불같은 질투로 되돌아오는 화살을 받던 시절.
어느날은 친한 4학년단짝 친구가 우리 집으로 놀러 왔다.
집엔 오라버니가 있었고, 친구를 데리고 온 내가 싫었던 그는 거실 벽시계의 바늘을 돌려놓곤 저녁시간이 다되었다며 이제 빨리 집으로 가라고 시계를 가리켰다. 그리고 온 지 얼마 안 된 내 친구를 집에서 쫓아냈다. 심지어 그 친구는 우리 오라버니에게 호감을 갖고 있었다. 그땐 순진하고 멍청하게도 3살 많은 오라버니의 말을 그대로믿고 친구와 난 이상하다 생각하면서도속아 넘어가고 말았다.
돈계산 빠르고 머리가 좋아 공부를 항상 잘했던 오라버니.
명절 세뱃돈을 받아오면 물건을 나에게 팔거나 돈을 빌려주거나, 저축을 해준다고 하고선 어느새 돌아서면 내 돈을 몽땅 자기 주머니에 털어 넣고 있었다. 어찌나 장난을 잘 치고 툭툭 건드리길 많이 하는지 항상 난 오라버니의 그런 면이 너무 싫었었다. 그래서 소심한 복수로 그땐 혼자 방으로 들어가 열쇠달린 비밀일기장에다가 오라버니와 둘이 똑같이 잘못했다며 항상 같이 혼내는 엄마의 욕을 신나게 썼던 나였다.
10살쯤이니 좀 더 어릴 때였다.
아파트 뒤편,우리 집 바로밑에 놀이터에 아이들이 놀 때면 오빠는 나에게 물폭탄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비닐에 물을 가득 넣고 묶어 우리 집 베란다에서 그걸 던지면 어찌 되겠는가. 그 물폭탄을 정확히 타겟에게 명중시켜던지곤 그 결과를 보기 전에 바로 머리를 숨기는 것이 핵심.
오빠의 손이 나의 머리를 누르며 함께 "수구리(경상도 사투리, 엎드려!)!"라고 외쳤던 것이 기억난다. 우린 사람들이 누구짓인지 모르게 잽싸게 숨었고, 그 결과는 놀이터쪽 밖에서 들리는 아이들의 울음소리나 사람들의 소리로 알 수 있게 되었다.
으악. 누구야! 다 젖었어. 으앙~
몇 번의 공격으로 실패와 성공이 이뤄졌고 어렸던 우린 함께 재밌다고 키득키득 웃으며 그걸 또 신나 했었다.
그리고 결국 그 장난질은 어느 날 약간 나이찬 아이가 화가 나 우리 집에 항의하러 직접 쳐들어온 것으로 종결된다. 우리는 복도에서 우리집으로 올라오는 화난 쿵쿵 발소리에 너무 무서워 집안 어딘가 숨었고, 그날 집에 있던 엄마는 미안하다며 우리에게 사과를 단단히 시키고 다신 그 장난을 안 할 것임을 다짐받은 후 그렇게 마무리 지었던 것으로 생각난다.
그날 이후 집집마다 있었던 우리 집 대문밑 작은 우유나 신문을 받아보던 문구멍으로 혹시 누군가 그앙값음을 위한 폭탄이라도 던져놓고 가는 건 아닌지 틈틈이 확인하며 또 얼마나 어리고 철없는 마음에 한동안 가슴 졸였는지지금도 문득 떠오르는 기억이다.
이제는 어느새 흰머리가 올라오는 40대 중반과 50을 향해 달려가는 오라버니와 나.
4년 전 오라버니의 초6 큰 아들과 초2 딸이 그렇게 자주 싸우다 서로 주먹다짐까지했었나 보다. 나에겐 마냥 이쁘고 귀여운 조카들이지만 집에서의 말썽꾸러기들은 딸바보 자기 아빠에게 걸려 당연히 크게 혼이 났다.
그리곤오라버니자신과 나의 어릴 때 모습이 떠올랐음이 분명하다.
가끔 방학, 명절 때 함께 만나 조카들과 밥을 먹고 놀긴 하지만 그날은 유난히오라버니가 좀이상했다.
어느새 조용히 다가와 평소와 다른 분위기를 보여주는 오라버니.
얼굴엔 짙은 진지함이 묻어있다. 그리고 하는 말.
" 정말.. 그땐 내가 미안했다....."
갑작스러운 사과.
"돌아보니 좀 알꺼같아. 내가 너에게 어릴 때 좀 심했었다는 걸."
그 한마디, 미안하단 말로 난 오라버니가 31년이 지난 지금 나에게 무엇을 말하는지 곧바로 알 수 있었다.
나이가 들면서 알아가는 게 있다. 그러나 나이 40대 이나이에 고해성사 같은오라버니의 사과를 듣게 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