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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N Jan 31. 2023

오라버니의 물폭탄

물벼락을 맞았다.


1992년. 4월의 어느 따뜻해진 봄날.

한시간 가까이 예쁘게 머리부터 발끝까지 꽃단장을  했다. 친구를 만나겠다고 새로 산 짧은 청스커트를 입고, 열번은 더 거울을 보고 난 후 주말에 집을 나섰던 그 당시 6학년. 꽃다운 나이 13살이었던 나.

5층짜리 아파트를 걸어 내려와 게이트를 나선 순간 맑디맑은 하늘에서 갑자기 내 머리위로 떨어진 엄청난 물세례.

말 그대로 마른 하늘에 날벼락. 아니 물벼락.


으아아아악! 차가워! 어억! 으아앙~엉엉엉.. 엄마~~

정확히 5층에서 쏟아부은 빨간색 우리집 양동이 물을 전부 맞고 쫄딱 비 맞은 생쥐꼴이 된 난 엉엉 울면서 그 길로 다시 되돌아서 물을 뚝뚝 흘리며 집으로 올라갔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날 그렇게 기분 좋게 외출하는 내가 유난히 꼴 보기 싫었나 보다. 그 사건의 주인공은 바로 3살 터울인 나의 친오라버니. 문을 열고 들어서니 벌써 현관 앞에서 하하하 푸하하 크크크. 화가 난 처참한 내 모습을 신나게 웃으며 자신의 장난이 통쾌하게 100프로 성공했음을 그렇게 표현하던 그. 물론 뒤이어 엄마에게 그 사실을 이르고 오빠는 혼나고, 난 다시 온몸을 닦고, 옷을 갈아입고, 약속시간에 늦고(그 당시엔 핸드폰도 없었다)등등이 이어졌다.






우린 어릴 때부터 그렇게 책에 나오는 이상적이고 사이좋은 오빠와 동생사이가 아니었다. 찐현실남매.

오라버니는 장남에 7대 장손. 난 공부부터 시작해 무엇하나 오라버니와 비교해 잘나지 못한, 오히려 건강이 약한 편인 평범한 여동생이었다. 하지만 딸바보 아빠가 내편이었고 그것이 또 오라버니의 불같은 질투로 되돌아오는 화살을 받던 시절.



어느날은 친한 4학년 단짝 친구가 우리 집으로 놀러 왔다.

집엔 오라버니가 있었고, 친구를 데리고 온 내가 싫었던 그는 거실 벽시계의 바늘을 돌려놓곤 저녁시간이 다되었다며 이제 빨리 집으로 가라고 시계를 가리켰다. 그리고 온 지 얼마 안 된 내 친구를 집에서 쫓아냈다. 심지어 그 친구는 우리 오라버니에게 호감을 갖고 있었다. 그땐 순진하고 멍청하게도 3살 많은 오라버니의 말을 그대로믿고 친구와 난 이상하다 생각하면서도 속아 넘어가고 말았다.

돈계산 빠르고 머리가 좋아 공부를 항상 잘했던 오라버니.

명절 세뱃돈을 받아오면 물건을 나에게 팔거나 돈을 빌려주거나, 저축을 해준다고 하고선 어느새 돌아서면 내 돈을 몽땅 자기 주머니에 털어 넣고 있었다. 어찌나 장난을 잘 치고 툭툭 건드리길 많이 하는지 항상 난 오라버니의 그런 면이 너무 싫었었다. 그래서 소심한 복수로 그땐 혼자 방으로 들어가 열쇠달린 비밀일기장에다가 오라버니와 둘이 똑같이 잘못했다며 항상 같이 혼내는 엄마의 욕을 신나게 썼던 나였다.







10살쯤이니 좀 더 어릴 때였다.

아파트 뒤편, 우리 집 바로밑에 놀이터에 아이들이 놀 때면 오빠는 나에게 물폭탄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비닐에 물을 가득 넣고 묶어 우리 집 베란다에서 그걸 던지면 어찌 되겠는가. 물폭탄을 정확히 타겟에게 명중시켜 던지곤 그 결과를 보기 전에 바로 머리를 숨기는 것이 핵심.

오빠의 손이 나의 머리를 누르며 함께 "수구리(경상도 사투리, 엎드려!)!"라고 외쳤던 것이 기억난다. 우린 사람들이 누구짓인지 모르게 잽싸게 숨었고, 결과는 놀이터쪽 밖에서 들리는 아이들의 울음소리나 사람들의 소리로 알 수 있게 되었다.

으악. 누구야! 다 젖었어. 으앙~ 

몇 번의 공격으로 실패와 성공이 이뤄졌고 어렸던 우린 함께 재밌다고 키득키득 웃으며 그걸 또 신나 했었다.

 

그리고 결국 그 장난질은 어느 날 약간 나이찬 아이가 화가 나 우리 집에 항의하러 직접 쳐들어온 것으로 종결된다. 우리는 복도에서 우리집으로 올라오는 화난 쿵쿵 발소리에 너무 무서워 집안 어딘가 숨었고, 그날 집에 있던 엄마는 미안하다며 우리에게 사과를 단단히 시키고 다신 그 장난을 안 할 것임을 다짐받은 후 그렇게 마무리 지었던 것으로 생각난다.  


그날 이후 집집마다 있었던 우리 집 대문밑 작은 우유나 신문을 받아보던 문구멍으로 혹시 누군가 그 앙값음을 위한 폭탄이라도 던져놓고 가는 건 아닌지 틈틈이 확인하며 얼마나 어리고 철없는 마음에 한동안 가슴 졸였는지 지금도 문득 떠오르는 기억이다.








이제는 어느새 흰머리가 올라오는 40대 중반과 50을 향해 달려가는 오라버니와 나.

4년 전 오라버니의 초6 큰 아들과 초2 딸이 그렇게 자주 싸우다 서로 주먹다짐까지 했었나 보다. 나에겐 마냥 이쁘고 귀여운 조카들이지만 집에서의 말썽꾸러기들은 딸바보 자기 아빠에게 걸려 당연히 크게 혼이 났다.

그리곤 오라버니 자신과 나의 어릴 때 모습이 떠올랐음이 분명하다.

가끔 방학, 명절 때 함께 만나 조카들과 밥을 먹고 놀긴 하지만 그날은 유난히 오라버니가 좀 이상했다.



어느새 조용히 다가와 평소와 다른 분위기를 보여주는 오라버니.

얼굴엔 짙은 진지함이 묻어있다. 그리고 하는 말.

" 정말.. 그땐 내가 미안했다....."


갑작스러운 사과.

"돌아보니 좀 알꺼같아. 내가 너에게 어릴 때 좀 심했었다는 걸." 

그 한마디, 미안하단 말로 난 오라버니가 31년이 지난 지금 나에게 무엇을 말하는지 바로 알 수 있었다. 

나이가 들면서 알아가는 게 있다. 그러나 나이 40대 이 나이에 고해성사 같은 오라버니의 사과를 듣게 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그날은 31년 전 오라버니에게 물벼락을 맞았던 열세살의 봄이 문득 소환된 그런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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