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새벽, 간호사가 나를 깨운 시간은 5시도 아니고, 새벽 3시 반이었다. 레이디병동에서는 5시가 될 때까지 아무도 날 깨우지 않았어서 이번에도 그럴 줄 알았는데... 비몽사몽 눈도 못 뜨고 간호사 손에 이끌려 혈압과 체온을 쟀다. 그리고 다시 기절했다가수액을 체크하러 온 4시 반에 다시 기상했다. 아무래도 고위험군 환자가 많다 보니 새벽 체크 횟수가 많은 것 같았다. 밤새 같은 병실 내에 있는 90대 할머니가 앓는 소리를 하도 크게 내셔서 잠을 잤는지 안 잤는지도 잘 모를 지경이었다. 잠을 설치다 보니 두통이 다시 찾아왔다.
눈을 떠서 제일 처음 마주하는 게 이 병동이란 사실은 아침부터 날 쳐지게 했다. 게다가 꿈 백화점에서 대체 무슨 꿈을 산 건지 밤새 악몽을 꿨다. 텐션이 떨어질 대로 떨어진 상태에서 일요일 아침을 맞이한 나는, 그러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엄마에게 카톡으로 투정을 부렸다. 뇌졸중 병동이 너무 싫다. 삭막하고, 환자들은 소리를 질러대니 귀마개 없이 살 수가 없다. 쾌적하지가 않으니 갇혀있는 것 같아 답답하고, 어딜 가든 후각이 고통이다. 이런 류의 말들을 아침 댓바람부터 주르륵 써 보냈다. 엄마는 아침 일찍부터 차분히 다 큰 딸의 투정을 들어주었고, 병실을 바꾸자는 현실적인 답변을 내놓았다. 병원비가 걱정되긴 했지만, 좀 더 사람이 적은 병실에 가면 나으려나 싶어 솔깃했다.
나는 복도에서 마주친 간호사에게 다른 병실이 있는지 물어보았고 코로나 때문에 인원수가 적은 병실을 원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이미 다 찼다는 답변이 들려왔다. 그 사이 엄마는 이미 프런트에 전화해 알아보고 있었다. 엄마가 들은 대답 역시 1인실이든 2인실이든 이미 가득 차서 병실이 없다는 것이었다. 우리 병동에 딱 하나뿐인 1인실은 만 96세 할머니가 쓰고 계셨다. (만 96세요...? 당연히 양보해야지...새파랗게 젊은 막내가 감히 어딜...) 나는 병실을 옮기려는 맘을 완전히 접고 그냥 여기 적응하기로 했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가 아니고 제발로 들어온 이대목동병원 창문 뷰
여기 계속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창밖의 푸른 하늘을 봐도 왜 더 답답하게 느껴지는 걸까.(왜인지 자꾸 윤동주 시인의 '쉽게 씌어진 시' 중 육첩방은 남의 나라 라는 구절이 떠올랐다. 무슨 일제 강점기도 아니고 제 발로 여기 들어와놓고선...그냥 그만큼 여기가 내가 있을 곳이 아닌 것 같고, 답답했다는 얘기다.)나는 한참을 멍하니 창밖을 보며 친구를 기다렸다.
오늘은 같이 사는 친구가 필요한 물품을 전달해주기로 한 날이었다. 친구가 가져올 것들은 내가 미리 전달해두었다. 책, 속옷, 병원 냄새가 싫은 나의 코를 달래줄 향기 나는 핸드크림, 향기 나는 섬유탈취제 등등. 그리고 무엇보다.......반찬통에 숨긴 순살 양념 치킨...!!!! 나는 평소에도 치밥하는 걸 꽤 좋아하는데, 간이 약한 병원밥을 먹고 있다 보면 치킨이 그렇게 생각이 났다. 사실 이전처럼 저 콜레스테롤 식도 아니고 일반식을 먹고 있는 데다가, 먹는 걸 가려야 하는 환자는 아니어서 외부 음식 섭취가 자유로웠는데, 양념치킨 같은 건 편의점에도 팔지 않으니.... 친구에게 사 와 달라고 부탁했다.
오전 10시 반쯤, 간호사에게 산책하고 온다고 한 뒤 로비로 나갔다. 로비 의자에 앉아있다 보니 친구가 쇼핑백을 들고 나타났다. 짐만 전달한다고 하고 들어온 거라서 금방 다시 가야 했다. 우리는 로비의 커다란 기둥 뒤에 숨어서 잠시나마 대화를 나눴다. 친구가 날 보더니 머리도 뽀송뽀송하고...평소보다 더 잘 살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그럼 대체 어떤 모습일 거라고 생각한 거지...) 병원 생활치 고는 깔끔히 씻고 지내서 그런가 보다. 짧은 인사를 나누고 친구를 배웅했다.
다시 병실로 올라가며 쇼핑백을 뒤져보니 제일 아래쪽에 락앤락에 담긴 치킨이 있었다. 분명 먹어도 되어서 반입하는 건데, 왠지 자꾸 몰래 가지고 들어가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서 밀수범마냥 조심스럽게 들어갔다.(정작 간호사들은 내가 뭘 가져오든 신경도 안 쓰셨음)
무사히 병실에 도착한 치킨 밀수범. 나는 친구가 전달해준 섬유탈취제를 내 자리에 한번 뿌리고, 상쾌해진 마음으로 앉았다. 좋은 향기가 나니 기분이 좋아졌다. 아까 답답하기만 했던 창문도 이젠 따사로운 햇살이 들어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침을 거의 먹지 않아서 배가 고팠던 터라 지난번에 사둔 땅콩크림빵을 먹으며 독서를 했다.
책을 읽으면 그나마 마음이 편안해진다. 그리고 곧 있을 점심 식사 시간에 치밥할 생각을 하니 설렜다. 책을 읽다 보니 곧 점심시간이 되었고, 나는 설레는 마음 반 + 혹시 누가 볼까 불안한 마음 반 으로 양념치킨을 꺼냈다.(아니 누가 봐도 되는데 왜 혼자 눈치 보는지?)
크으으...이거지. 이른 아침에 치킨집이 문을 열지 않을까 걱정한 친구가 어젯밤에 주문을 해두었던 거라 많이 딱딱하긴 했지만, 그래도 진짜 꿀맛이었다. 치킨이랑 같이 먹다 보니 금방 배가 불러져서 밥을 반밖에 못 먹었다. 병원에서 치킨 먹는 사람이 나 말고 또 있을까?(TMI지만 저 양념치킨은 페리카나 꺼다. 역시 양념은 페리카나 아니면 처갓집. 옛날 치킨 맛이 맛있다.) 밥을 다 먹고 나니 언제 흘렸는지 시트가 엉망이 되어 시트를 새로 갈아야 했다.(꽤나 열정적인 식사를 했나 본데?)
맛있는 점심 식사를 마치고 쉬고 있는데, 역시 모든 일엔 대가가 따르는 법. 곧 강한 흉통이 찾아왔다. 홈런볼 먹고도 그랬는데...외부 음식을 먹으면 아픈 건가? 그냥 병원밥만 먹을걸ㅜㅜ하는 후회를 했지만 이미 늦었고, 통증은 점점 더 심해져갔다. 아프기는 심장 부근이 아픈데, 주로 음식을 먹고 나서 아픈 편이라 식도염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참다가 더 이상 참기 힘들어진 나는 간호스테이션에 찾아가 내 증상을 이야기했다. 깜짝 놀라신 간호사분들은 그 자리에서 바이탈 체크부터 한 뒤 약을 가져올 테니 자리로 돌아가 대기하라고 했다. 곧 약이 처방될 줄 알았는데 1시간 넘게 가슴팍을 부여잡고 기다려도 아무도 오지 않았다. 식후에 주로 아프니 식도염 같긴 한데....식도염도 이렇게 강한 흉통이 오나...? 아까 간호사에게 1부터 10까지 중에 통증 수치가 7이라고 답했는데, 기다리는 사이 8 정도로 올라갔다.
얼마 전 아산병원을 찾았을 때, 신경과 의사로부터 뇌경색의 원인 중 하나가 심장이라는 얘길 들은 적이 있다. 특히나 젊은 사람일수록 심장 질환이 뇌경색을 유발할 가능성이 높은데, 심장에 구멍이 있다든지 하면 뇌경색이 생길 수도 있다고 했다. 그래서 심장 검사를 철저히 해야 한다고 했었다. 가슴팍을 부여잡고 끙끙대다 보니 그 얘기가 자꾸 생각이 났다. 진짜로 식도가 아니라 심장이 아픈 거면 어떡하지? 나는 이대로 죽는건가?(아님) 근데 치킨 먹고 죽는 사람도 있나?
별의별 생각을 다하고 있다가 한쪽에 벗어둔 크리스마스 양말이 눈에 보였다. 아까 날이 너무 더워서 잠깐 벗어두었는데 그 사이 아파진 것이다. 나는 이걸 벗어서 아파지기라도 한 것처럼 황급히 다시 양말을 신었다. 이 양말이 병원에 챙겨 온 것 중 마지막 크리스마스 양말이어서 아껴신어야 했다. 그러다 문득 행운이 필요한 날들이 너무 많아져서 크리스마스 양말이 더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뭐 과학적으로 증명된 것도 아니고 양말과 아픔은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지만 그냥 내 마음이 그랬다.) 초조해진 나는 엄마에게 밑도 끝도 없이 양말을 사달라고 했다. 엄마는 여름을 앞둔 이 계절에 크리스마스 양말을 사는 것을 의아해하면서도 얼마든지 사 주겠다며 고르라고 했다. 나는 지난 화에서 언급했던 기준을 충족하는 양말을 신중히 골랐다.(19화 참조)
양말을 고르고 있으려니 간호사가 진통 수액을 들고 찾아왔다. 오늘이 일요일이라 우선 진통 수액을 맞아보고 내일 오전 교수님 회진 때 이야기해봐야 할 것 같다고 했다. 나는 수액을 맞으며 진통제 성분이 얼른 돌기를 기다렸다. 양말을 선물 받게 되자 그나마 기분이 좀 나아졌다.(사실 선물이 아니라 강매지만) 나는 두통 일기 뒤편의 메모장을 통해 내일 회진 때 의사 선생님께 말씀드릴 증상들을 적기 시작했다.회진 시간은 진짜 폭풍처럼 지나가기 때문에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대비해야 한다.
편두통, 소름 돋는 증상, 흉통, 손 저림. 이렇게 4가지 증상 중에 손 저림 빼고는 아직 나아진 게 전혀 없었다. 수액을 맞아서인지 규칙적인 생활을 해서인지 빈도가 줄긴 했어도 여전히 저 증상들이 날 괴롭혔다. 정확히 증상이 나타난 날부터 정리해보고 나니, 4월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내 4월 왜 이래...?) 주르륵 나타난 증상부터 4월 28일에 입원해 5월을 병원에서 맞이하기까지.남들에겐 꽃이 피고 봄이 찾아오는 따스한 계절이겠지만,나에게 4월은참으로 잔인한 달이었다.
엄마한테 저 사진을 보내고 '4월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하고 묻자 잔인한 4월은 이제 지나갔으니, 따뜻한 5월을 맞이하자는 답변이 돌아왔다. 증상 4개 중 3개만 해치우면 되겠다고 하자 마치 어둠의 조직을 거느리고 있는 보스의 명령처럼 '해치워'라는 톡이 왔다.(예, 보스.)
엄마 말대로 나머지 증상도 얼른 해치워버리고 집에 갈 수 있을까? 지난번 입원에서는 그냥 여기 있는 게 너무 싫어서 하루빨리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만 했었는데, 지금은 너무 뚜렷한 증상들로 고통받고 있다 보니 이젠 집에 가는 게 더 무섭다. 집에 가서 갖가지 증상들로 고통받으면서 혹시 어떻게 될까 무서워하는 삶을 사는 것보다 그냥 좀 불편하더라도 안전한 병원에서 빨리 이유를 찾아내서 낫고 싶었다
주변에서는 이 병원에서 이번에도 원인을 못 찾으면 전원하자는 의견을 끊임없이 주었다. 나는 또 병원에 갈 생각에 눈앞이 캄캄했지만,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다. 나중 일은 나중에 생각하자. 다시 다른 병원에서 검사할 생각을 하면 끔찍하다.
어제 MRI실에서 생각했던 드넓은 창문이 자꾸만 머릿속에 맴돌아서, 오늘의 집에서 패브릭 포스터 쇼핑을 했다.(공허할수록 돈을 쓰는 악취미를 가지고 있음) 내 침실에 멋진 뷰를 가진 큰 창문이 있을 리가 없으니 예쁜 포스터라도 붙여놓고 기분을 내고 싶었다.
이렇게 벽에 붙이는 가짜 창문이라고 생각하면 된다.(실제로 보면 가짜인 게 티 나긴 하겠지만...너무 예쁘다.) 상상이 인생의 3분의 1을 채우는 사람으로서 저런 창문 옆에서 휴양지에 온 기분이라도 내고 싶었다. 병원에 있다 보니 저런 창문이 있는 곳으로 훌쩍 떠나고 싶어졌는데, 또 몸도 안 좋고 현생이 있으니 그럴 순 없고...가짜로라도 기분 내는 거다. 언젠간 실제로 저런 집에서 살 수 있으려나.
일기를 쓰고, 하루를 마무리하려고 보니 같이 사는 친구에게 연락이 와있었다. 강아지 유솜사탕이 잠도 안 자고 날 기다린다는 이야기였다.(내새끼ㅠㅠ)
이때다 싶어 자랑하는 내새끼 미모. 얼마 전에 생일이었다.
강아지에게도 카톡할 수 있으면 참 좋을 텐데... 최신 스마트폰으로 사다가 손에 쥐어주고 싶다. '엄마 병원에 와 있으니까 기다리지 말고, 밥도 잘 먹고, 잠도 잘 자고, 유치원도 잘 다녀와. 금방 갈게.'라는 말을 속으로만 되뇌다가 솜이 사진을 보면서 자리에 누웠다. 내일은 동생이 오기로 한 날이다. 그럼 오늘보단 덜 우울하겠지. 솜이 영상과 사진을 보면서 히죽대다가, 90대 할머니가 소리 지르는 것에 놀라 귀마개를 꼈다. 내일 아프지 않으려면 오늘은 푹 자야한다. 재입원 4일째 일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