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난 책 이야기 43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세 권의 책을 세 달에 걸쳐 읽었다. 1700페이지가 넘는 대 장편소설이다. 이 소설이 대단하다고 말할 수 있는 첫 번째 이유다. 읽기도 만만치 않은 분량을 써낸 작가에게 경이를 표한다.
작가는 스토리의 전개 도중 불쑥불쑥 등장한다. “그의 최후에 대해서는 때가 되면 얘기를 하겠다.”거나 “기민하고 영리한 부류에 속하는 아가씨가 어쩌다가 그런 보잘것없는 그 당시 그의 별명대로 ‘푼수’에게 시집을 갈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구태여 설명을 늘어놓지 않겠다.” 등 소설의 전반부부터 텍스트 속에 불쑥 들어와 아주 태연하고 능청스럽게 이야기에 개입해 스토리를 끌고 가며 소설을 읽는 재미를 더해준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소설의 형식을 빌리고 있긴 하지만, 종교와 철학과 인간의 심리를 망라한 책이다. 이 책이 대단하다고 느낀 두 번째 이유다. ‘친부 살해’라는 커다란 줄기에, 재산을 둘러싼 부자간의 갈등, 한 여자를 두고 벌이는 아버지와 아들의 경쟁과 시기와 질투, 서로 다른 가치관을 가진 형제들의 반목 등 다양한 사건이 얽히고설켜 이야기를 이어간다.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운 카라마조프. 그에게는 세 아들이 있다. 첫째 아들 드미트리가 육체와 욕망에 충실한 본능적인 존재라면 둘째 이반은 무신론자이며 냉철한 이성을 가진 이성주의자다. 막내 알렉세이는 타인에 대한 무한한 사랑과 동정이 넘치는 종교심이 두터운 인물이다. 그리고 그의 아들로 추정되지만, 카라마조프가에서 하인으로 일하고 있는 스메르자코프는 음흉하고 비열한 존재다. 카라마조프를 살해했음에도 죽는 순간까지 그 사실을 밝히지 않는다. 세 아들은 모두 경박하고 음탕하고 탐욕적인 아버지의 존재에서 벗어나고자 하지만, 결국 자신들에게 카라마조프가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못한다.
작가인 도스토옙스키는 이 소설에서 구원은 신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죄를 뉘우치는 양심의 회복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드미트리는 아버지를 죽였다는 누명을 쓰고 20년 형을 선고받고 시베리아로 떠나야 하는 형벌을 받게 된다. 죄와 벌을 결정짓는 사법 제도가 그를 죄인으로 인정한 것이다. 아무런 증거가 없음에도 평소 아버지와 자주 갈등을 일으키고 아버지를 죽이겠다는 말을 공공연히 하고 다녔다는 사실만으로도 아비가 황제이며 신인 세계에서 이미 그는 죄인인 것이다. 그러나 알렉세이는 그런 형의 도주를 돕겠다는 의도를 내비친다. 형의 도주를 돕는 것은 분명한 위법 행위임을 알면서도 누구보다 종교적인 인물이었던 알렉세이가 그런 행동을 결심한 이유는 형이 감옥에서 비록 아버지의 살해에 대한 자신의 죄목에 대해서는 아니지만, 그동안 방탕하게 살아온 자신의 삶을 진심으로 뉘우쳤고 이로 인해 형이 구원받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또 그는 죄에 대한 의도만으로도 죄가 됨을 이반을 통해 보여준다. 아버지를 죽이고 싶었으나 죽이지 않았고 그저 죽음을 바랐을 뿐인데 이반의 영혼은 고통받는다. 이반의 고통은 신과 사법 제도가 내린 벌이 아니라, 자신의 양심이 내린 벌이었다. 종교와 사법 제도는 인간의 죄와 벌을 결정짓는 지위를 오래 누려왔고, 지금도 그 권위는 존속되고 있다. 그러나 도스토옙스키는 자신의 양심이 구원의 요건이라고 보았다. 책에서 방대한 분량을 할애하며 인간과 종교에 대한 성찰을 풀어내고 있다.
카라마조프적인 성향은 카라마조프가에만 존재한 것은 아니다. 우리 모두의 내면에는 카라마조프적인 성향을 갖고 있다. 그것을 어떻게 드러내느냐에 따라 드리트리가 될 수 있고, 이반이 될 수 있고 알렉세이가 될 수도 있고, 스메르자코프가 될 수도 있다. 시대와 공간을 넘은 그들의 분신이 우리인 것이다. 결국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자신의 내면에서 구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도스토옙스키는 카라마조프가의 서사가 아닌 일류샤의 장례식으로 소설을 마무리한다. 이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요한복음의 내용을 통해 죽음을 통해 용서와 회해를, 죽음이 생의 단절이 아닌 또 다른 희망으로 승화될 수 있음을 이야기하고 싶은 작가의 의도로 보인다. 그는 아이들을 통해 미래의 희망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순수하고 무구한 아이의 세계가 곧 신의 세계이며, 이 세계의 회복이야말로 인류를 구원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 같다.
또 작가는 ‘모든 사람들은 모든 사람들 앞에서 모든 것에 대해 유죄’라는 신념을 끌고 나간다. 이런 관념에서는 누군가를 비난하거나 벌을 주거나 용서를 하는 행위 자체가 모순이 되는 것이다. 결국 인간은 모순적인 존재일 수밖에 없다. 인간이 가진 선악에 대한 이분법적 관념 역시 무너뜨린다. 그의 신념은 종교의 존재 방식에 대해서도 고민하게 한다. 종교의 본질적인 의미를 망각한 채 외부 현상에 집착하며 방편적인 것들이 진리인 것처럼 변질되어 버린 종교는, 자신이 가진 권위로 인간 위에 군림했던 것이 사실이다.
넌출넌출 달려 올라오는 수많은 관념들 사이 구원, 양심, 신, 선악, 종교, 이성, 본성, 내면, 욕망, 이기심 등의 단어들이 숙제처럼 남은 책이다. 두께만큼 묵직하다. 그게 결국 삶일 것이다. 결국 모든 질문과 답도 내 안에서 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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