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詩한 일상 6
11월의 호박꽃, 그리고 기억
소소한 일상, 소소한 행복, 소소한 깨달음
11월의 호박꽃, 그리고 기억
식도염약이 똑 떨어졌다. 병원을 가려고 준비를 하다가 다른 길로 샜다. 구량리 은행나무를 보러 갔다. 백미러는 뒤따르는 차를 비추고 있었지만 나는 백미러에 비친 하늘에 마음을 주고 있었다. 그 바람에 신호를 놓칠 뻔했다.
이 즈음 나는 은행나무에 집착하고 있음을 알아챘다. 어제는 백련암 은행나무를 보고 왔다. 그들을 배웅해야만 비로소 내 마음속의 가을도 갈무리가 되는 느낌이다.
들에 홀로 선 은행나무는 아직 완연한 황금빛은 아니었다. 둥치에 기대 보기도 하고 가만가만 둘레를 걷기도 하고 잎들을 향해 까치발을 해 보기도 했다. 바람이 제법 거세고 매웠다.
그리고 그곳을 돌아 나오던 길에 만났다. 어느 농가의 낮은 담장에 핀 11월의 호박꽃을. 나는 그 호박꽃에 안쓰러운 마음을 보태지 않았다. 비록 열매를 달지 못할지라도 지금 이 순간, 그는 꽃이었고 그 자체로 이미 완전했으니까.
호박꽃 한 송이에 출렁출렁 기억이 달려 올라왔다. 평생 자식을 낳지 못한 엄마 친구가 생각나고 그 이야기를 들려주신 엄마가 생각나고 그 이야기를 시로 썼던 기억까지.
2012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최종심까지 올랐던 그 작품을 오래 잊고 있었다. 느닷없는 기자의 전화, 시조 공부를 어떻게 했냐는 질문에 그간의 경위를 설명하다 문예지로 등단했다는 이야기를 하고 말았다. 그 사실이 신춘문예 응모에서는 공공연한 비밀이라는 것도 몰랐을 만큼 무지하고 순진했었다. 그렇게 허무하게 놓쳐버리고 마음을 앓았다.
문득, 그 작품이 궁금해 집에 와서 찾았다. 컴퓨터, 노트북, USB 두 개를 뒤져 겨우 찾았다. 작품집을 내면서 그 작품을 싣지 않은 걸 보면 그 작품에 깃든 아린 기억에서 여전히 자유로워지지 못했는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빙그레 웃을 수 있는 추억이 되었다. 세상의 모든 상처들은 그렇게 잊히기도 하고 지워지기도 한다는 것을 11월의 호박꽃 한 송이가 다시 알려주었다.
열매를 달지 못할지도 모르는 11월의 호박꽃일지라도 괜찮다. 그는 지금 그 자체로 충분하니까.
거창하지도 화려하지도 않은 우리 삶도,
지금 이대로 괜찮다.
그녀는 임신 중
10년 동안 가지 못한 몽골 땅 그 서식지
방사장 한 귀퉁이 날개 다친 독수리 부부
짝짓기 행동 보인 후 품은 것은 돌멩이 알*
여든의 엄마 친구 이정골 아주머니도
소원이 저거였지 ‘돌이라도 품었으면’
야바위 돌돌이 판에 돌고 있는 분홍의 꿈
저어도 흔들어도 제 모습 잃어버린
유통기한 지난 우유 가슴에 쟁여놓고
그녀의 야윈 자서전 곰팡이가 세를 든다
*2011년 5월 2일 중앙일보 신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