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詩한 일상 7

늙은 호박을 긁으며

by 마법모자 김시인

소소한 일상, 소소한 행복, 소소한 깨달음


누렇게 익은 가을 호박은 가을의 풍요로움을 안겨준다. 호박죽을 끓여도 좋고 호박전을 부쳐도 좋고 착즙기에 짜 즙으로 마셔도 좋은 건강식품이다.


그런데 나는 호박전이 싫었다. 시어머니의 유별난 호박전 사랑 때문이었다. 명절이 되면 시어머니는 어김없이 호박 한 덩이를 거실에 놓아두고 호박을 긁어 호박전을 부치라 성화셨다. 명절 음식 준비며 청소며 심지어 냉장고 청소까지 당신이 정작 집안 정리며 청소라도 해 놨으면 일이 적을 텐데 그것까지 해야 하는 명절에, 명절 음식 준비로 분주한 걸 뻔히 알면서도 호박전을 당신 앞에 내놓을 때까지 호박전 타령을 무한반복 하셨다.


당신이 호박전에 집착하는 이유는 더 기가 차다. 본격적인 명절 음식을 장만하기 전에 호박전을 부쳐 아이들을 먹이라는 것이다. 정작 아이들은 호박전에 관심도 없고 할머니의 성화에 겨우 먹는 시늉만 하는 정도다. 아마 당신께서 젊었던 시절, 먹을 것이 많지 않았던 때에 호박전을 부쳐 아이들 배워 먼저 채워놓으면 아이들이 명절 음식에 눈독을 덜 들이고 성가시게 하지 않을 것이라는 나름의 계산인 것 같았다.


이제는 음식이 남아도는 세상인데도 여전히 당신의 방식을 강요하신다. 못 들은 척도 해 보고, 명절 음식을 먼저 해 놓고 하겠다고 해도 막무가내이시다. 그래서 내게 호박전은 시어머니의 그 성화의 다름 이름이었다.


30년을 어머니와 함께 명절을 맞으며 살았다. 그리고는 알았다. 당신께서 호박전에 깃든 그 시절의 삶을 추억하고 계시다는 것을. 그 추억 속 그리움을 함께 먹는다는 것을.


호박전 부쳐라는 소리가 그렇게 듣기 싫더니 이제는 으레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이니 마음이 편하다. 그리고 몇 년 전부터는 그 곁에 앉아서 호박전을 몇 점 떼어먹기도 한다.


음식에 깃든 기억은 참 오래간다. 삶에 지치고 허기진 날 나는 엄마의 음식이 생각난다. 푸성귀가 나던 계절은 거의 매일 만들어 주시던 제피가 들어간 겉절이, 살얼음 동동 떠 있던 식혜, 메밀묵, 두부, 그리고 아침마다 들깨를 돌확에 갈아 끓여주시던 시래깃국, 미나리 초무침, 수제비, 지물 국수...... 아무리 엄마 흉내를 내 보아도 절대 그 맛을 낼 수 없는 엄마표 음식들이 엄마만큼 그리운 날이 있다.


미국에 있는 큰딸도 가끔 똑같은 말을 한다. 엄마가 해 주던 거 생각나서 해 봤는데 그 맛이 안 난다고. 그것은 음식에 깃든 추억이 함께이기 때문일 것이다.


시어머니의 그 별난 호박전 사랑에 질려 나는 호박전을 멀리했다. 그런데 오늘 내가 먹겠다고 늙은 호박을 긁어 호박전을 부쳤다. 미워하며 닮는다는 말이 있다. 당신의 며느리로 산 30년 세월에 그분을 닮아가는지 나이가 드니 입맛이 변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호박을 긁으며 나는 시어머니 생각을 했다.


더 애잔한 추억이 되기 전에 호박을 긁으며 평화로울 수 있어 다행이다. 늙은 호박이 내어준 속살이 참 달았다. 속을 열었는데 군데군데 무른 곳이 있었다. 조금만 더 늦었으면 긁어보지도 못하고 버릴뻔했다.


썩기 직전의 무른 살, 누군가의 삶의 은유 같아 도려내며 마음이 아팠다. 휴일 하루가 옛 기억으로 꽉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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