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처럼 사소한 것들
클레어 키건/홍한별 옮김/다산책방/2024
사소함의 위대함
우리는 거대담론의 시대를 살고 있다. 세계는 지구촌이라는 하나의 공동체로 인식되고, 환경과 기후, 전쟁 등은 전지구적인 관점에서 해법을 찾아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정치와 경제 또한 강대국들의 힘의 논리로 작동된다. 점점 거대화되고 집단화되는 세계 속에서 개인은 외면당하며 점점 왜소해진다. 개인은 ‘사소한’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처럼 사소한 것들’의 저자 클레어 키건은 거대한 혹은 부당한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의 원천이 말하거나 말하지 못한 ‘사소한’ 개인의 감정과 행동임을 상기시킨다.
책 ‘이처럼 사소한 것들’의 중심인물인 빌 펄롱은 빈주먹으로 태어나, 석탄 파는 일로 아내와 다섯 딸의 생계를 책임지는 가장의 역할에 충실한 인물이다. 그의 삶은 풍족하지 않지만, 배고픔과 추위를 면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자신은 운이 참 좋다고 여긴다. 펄롱의 엄마는 열여섯 살 때 미시즈 월슨의 집에서 가사 일꾼으로 일하던 중 임신을 했고, 아버지가 누군지를 듣지 못한 채 갑자기 죽고 말았다. 그러나 펄롱은 과거에 머물지 않기로 했다. 아버지의 부재에 대한 어린 시절의 결핍이 현실을 더욱 충실하게 살아가게 하고자 하는 의지로 작용해, 그는 다섯 딸을 부양하는데 집중했다.
어느 날 저녁 약속한 시간보다 훨씬 이르게 수녀원에 배달을 갔다가, 젊은 여자와 어린 여자아이들 여남은 명이 바닥에 엎드려서 죽어라고 바닥을 문지르고 있는 장면을 목격한다. 그들 중에 신발을 신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검은 양말에 끔찍한 회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으며, 눈에 흉측한 다래끼가 난 아이도 있었고, 머리카락이 눈먼 사람이 커다란 가위로 벤 것처럼 엉망으로 깎여 있었던 아이도 있었다. 그 아이가 펄롱에게 도와달라고, 강까지만 데려다 달라고, 대문 밖으로 만이라도 나가게 해 달라고 부탁한다. 펄롱이 거절하자 그러면 집으로 데리고 가 달라고, 일하다 죽을 때까지 일하겠다고 말하지만, 펄롱은 집에는 딸 다섯하고 아내가 있다며 이를 거절한다. 그날 밤 아내에게 수녀원에서 본 것을 이야기했지만, 아내 아일린은 그런 일은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며, 사람이 살아가려면 모른척해야 하는 일도 있으며, 그래야 계속 살아갈 수 있다는 충고를 한다.
크리스마스이브 날, 수녀원에 석탄 배달을 갔다가 펄롱은 석탄 광에서 한 소녀를 발견한다. 펄롱은 여자아이가 하룻밤 이상을 그곳에 머물렀음을 알아차린다. 밖으로 나온 아이는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는 데다 머리가 엉망으로 깎여 있었다. 아이는 14주 된 아기를 둔 엄마였고, 그 아기에게 젖을 먹일 수도 없고, 어떤 상태인지도 모른다며 말한다. 펄롱과 아이를 본 수녀 원장은 그들을 환대한다. 다른 수녀의 손에 이끌려 사라졌던 아이가 다시 나타나자 원장은 아이에게 광에 갇힌 이유를 묻고, 아이는 자신이 광에 갇힌 이유가 숨바꼭질 놀이 때문이었다고 말하며, 그냥 아무것도 아닌 일이었다고 말한다. 펄롱으로 하여금 그 사고는 단순히 아이들의 놀이로 인해 발생한 사건이었음을 믿게 하려는 의도였다.
수녀원은 직업 여학교를 운영하며 세탁소도 겸업하고 있었다. 수녀원은 온갖 뒷소문이 무성한 곳이다. 세탁소는 평판이 좋았고, 직업학교에 있는 여자들은 타락한 여자들이어서 교화를 받는 중이라고, 새벽부터 한밤중까지 더러운 세탁물에 얼룩을 씻어내면서 속죄하는 거라고 하는 이가 있었다. 동네 간호사는 열다섯 살 아이가 빨래통 앞에 서서 너무 오래 일한 탓한 정맥류가 생겼더라고 했다, 반면 그곳에서 뼈 빠지게 일하는 쪽은 수녀님들이고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또 그곳은 그냥 모자 보호소로 결혼 안 한 여자가 아기를 낳으면 가족이 미혼모를 그곳에 보내 숨기고 사생아로 태어난 아기는 입양을 보내고, 그 과정에서 수녀들이 상당한 돈을 챙기고 그게 수녀원에서 하는 사업이라고도 했다.
마을 사람들 다수는 수녀원에서 행해지는 비도덕적인 일을 알고 있었다. 아내 아일린이 그런 일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냐며 모른 척해야 계속 살아갈 수 있다고 펄롱에게 충고했듯, 식당을 운영하는 미시즈 케호 역시 그 수녀들이 안 껴 있는 데가 없다며 거기 일에 관해 말할 때는 조심하는 편이 좋다고 충고한다. 석탄 광에서 아이를 데리고 나온 날, 거리에서 만난 사람들 역시 그 아이가 펄롱의 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차리자 다정하던 태도를 바꾼다. 다섯 딸을 잘 키우고 싶은 마음이 강했던 펄롱에게 이 근방 잘 풀린 여자애 중에 그 학교에 안 다닌 애는 한 손으로 꼽을 정도라는 미시즈 케호의 충고는 펄롱의 마음을 더욱 위축되게 만든다.
펄롱은 도움을 요청하는 아이의 부탁을 거절했고, 수녀원의 비도덕적인 행위에 대해 외면하고자 했다. 그 이유는 자신의 행위가 딸들의 장래에 나쁜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더구나 수녀원의 원장 역시 딸 둘이 여기 학교에 다니고 있고, 다른 둘은 이곳에서 음악 수업을 받고 있으며 꽤 진척이 있음에 관심을 표명하며, 요즘은 애들이 너무 많아 모든 애들이 다 갈 곳을 찾아가기가 쉽지 않다는 현실을 상기시킨다. 당신의 행동 여부에 딸들의 장래가 걸려 있다는 암묵적인 협박이다. 펄롱은 수녀원 원장이 건네는 말의 진위를 알아챘으며, 이성적으로는 그런 결론에 다다랐음에도 그는 크리스마스이브 날 가족이 있는 집으로 쉬, 돌아가지 못하고 거리에서 방황한다.
크리스마스 전등이 켜진 시내를 거닐고, 오래된 스태퍼드 상점 앞에 머물고, 조이스 가구점 앞에서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이발소에 가서 머리를 깎는다. 핸리핸 가게에서 아내에게 선물할 구두를 찾고, 문 열린 튀김집에 들러 세븐업 한 캔을 마신 뒤 다시 강가로 걸으며 왜 편안하고 안전한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을까를 생각한다. 그렇게 편안하게 집으로 향하지 못했던 그는, 결국 예전에 아이를 발견한 수녀원의 석탄 광으로 걸음을 옮긴다. 그곳에는 자신이 이전에 구해준 그 아이를 다시 만난다. 단순한 술래잡기 놀이 때문에 그곳에 갇혔다고 말했던 그 소녀는, 여전히 그 광속에 갇혀 있었던 것이다. 펄롱은 자기 보호 본능과 용기가 서로 싸우는 자신을 보며, 사제관으로 아이를 데려갈까 생각했지만, 그는 다 한통속이야를 외치며 아이를 데리고 밖으로 나온다.
아이를 데리고 거리에 나선 펄롱은 서로 돕지 않는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냐는 생각을 한다. 대가를 치르게 될 테지만, 그래도 변변찮은 삶에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이와 견줄만한 행복을 느껴본 적이 없음을 깨닫는다. 맨발의 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가는 길, 두려움이 다른 모든 감정을 압도했으나 자기들은 어떻게든 해나가리라 기대했고 진심으로 그렇게 믿었다.
펄롱은 미시즈 윌슨이 아니었다면 어머니 역시 그곳에 가고 말았을 것이며, 더 옛날이었다면 자신이 구하고 있는 이가 자기 어머니였을 수도 있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또한 내내 펄롱의 곁에서 변함없이 지켜보았던 네드는, 펄롱으로 하여금 자기가 더 나은 혈통 출신이라고 생각하게 하려고 자신이 펄롱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평생 숨기고 살았다. 펄롱은 미시즈 윌슨이 보여준 친절, 네드의 배려 등 말이나 행동으로 하거나 하지 않은 사소한 것이 합쳐져 하나의 삶을 이루었음을 깨닫게 된다. 그 사소한 것이 지금의 자신이 존재하게 했다는 사실도.
이 소설은 허구지만, 아일랜드 국가와 가톨릭교회의 묵인 하에 자행했던 부당한 노동과 아동 학대, 유아 사망 등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쓰여졌다. 국가와 교회의 거대한 권력이 자행하는 이러한 행위들에 대해 대다수의 개인은 침묵하거나 모른 척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가족을 지켜야 했고, 삶을 영위해야 했기에. 그들이 지켜가야 하는 삶은 작은 균열에도 쉽게 무너질 수 있을 만큼 위태롭고 빈약했다.
미혼모인 펄롱의 엄마를 받아들인 미시즈 윌슨이나, 더 나은 혈통이 가진 이가 자신의 아버지일 거라고 믿게 만들기 위해 자신의 존재를 숨긴 네드의 배려 덕분에 펄롱의 ‘지금’이 존재할 수 있었듯, 수녀원의 높은 성벽 속에 갇혀 살던 아이는 서로 돕는 사소한 행위에서 삶의 의미를 찾고자 했던 펄롱으로 인해 삶이 펼쳐지는 ‘이곳’에 존재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작은 관심과 사랑이 미시즈윌슨과 네드에서 펄롱에게로, 펄롱에게서 아이에게로 흐를 것이다. 이 땅에서 인간의 삶이 영위될 수 있게 한다.
사소한 일상이 모여 일생이 된다. 사소한 개인이 모여 집단이 된다. 거대담론 속 개인은 갈수록 왜소해지지만, 결국 살 만한 세상을 만드는 일은 그 개인에게서 나온다는 것을 이 책은 말해주고 있다. 삶이 거창할 필요는 없다. 작고 소박한 사랑만으로도 충분하다. 그것은 부당한
이 책은 참 잔잔하다. 내면의 묘사가 그렇고 풍경의 묘사가 그렇다. 그러나 그 잔잔함을 뚫고 무엇인가가 자꾸 일어난다. 격렬하지 않은데 멈추어 있지도 않다. 풍경이 흐르듯, 삶도 생각도 흐른다. 자꾸만 골똘해지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