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란 무엇인가? 참 대략난감한 질문이다. 수백 가지 대답이 나올 수도 있고 단 하나의 명징한 답이 없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이런 질문에 고민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시를 알고 싶기 때문이다. 시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골똘해져도 결론에 다달을 수 없고 아무리 무심한 척해도 결국 그 언저리를 서성이게 될, 시는 내게 그런 존재다.
우리의 문학 교육은 실패했다. 문과 대학생조차 문학작품과 격리되어 있는, 주체적 독자가 소멸해버린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어려운 시가 깊이 있고 괜찮은 시라는 시에 대한 미신과 서정시에 대한 과도한 요구 또한 주체적 독자의 소멸을 초래했다. 문학작품은 피라미드와 같다. 그래서 고전을 읽어야 한다.
시의 언어는 기의보다 기표가 가깝다. 시의적절한 기표는 시가 생소하고 낯설고 돋보이게 한다. 이야기는 꾸며 쓰도 되지만 노래나 소리는 일심으로 불러야 한다. 좋은 시는 번역 불가능한 것이다. 시가 시를 낳는다.
고도한 성취의 시편을 생산하는 것이 시인의 직업윤리다. 시평담론은 시를 향유하는데 빛(길잡이)을 던져주지만 역기능 역시 존재한다는 것을 간과하면 안 된다. 주체적 독자는 시평 담론의 오도적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어야 한다.
프로이트는 나보다 앞서서 시인들이 무의식을 발견했다. 내가 발견한 것은 무의식을 연구하는 방법일 뿐이다. 훌륭한 시는 인지적 충격을 준다.
시가 시를 낳는다. 모든 시는 알게 모르게 선행 시편을 딛고 서 있게 마련이다. 예술 작품은 선행 작품을 밑그림으로 해서 겹쳐놓은 두 겹 세 겹의 겹그림이다. 그 울림을 빠트리지 않고 포착하는 것이 훈련된, 혹은 성숙한 독자의 수용방식이다.
모든 정성을 시에 바치지 않는 시인에게 뮤즈는 영락없이 앙갚음을 한다.
깨달음에는 슬픔이 따른다. 최상의 문학에는 인간 존재에 대한 제어된 슬픔이 인지의 충격과 함께 배어 있다. 말 한마디, 글 한 줄을 꼼꼼히 읽는 것이 글쓰기에 바쳐진 노력에 대한 경의의 표시이다.
은유는 시언어의 중요한 특징이다. 비유는 단순한 장식이 아니다. 분석 이전의 직관적인 파악이 중요하다. 비유는 언어의 장식이나 생각의 의상이 아니라 언어의 구성요소이다. 문학과 미는 동의어가 아니다. 은유는 유사성을 근거로 하지만 상의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흥미 있는 상징은 대체로 은유적이다. 취지와 수단 사이의 당돌한 병치에서 시적 긴장이 빚어진다.
문학에서 모티브는 빈번하게 되풀이되어 나타나는 요소다. 하지만 같은 모티브에서도 전혀 다른 시가 나타난다. 넓은 의미에서 문학은 공동제작이다. 시의 목소리는 열 겹 스무 겹 얽혀있다.
구체적 삶을 언어적 지시의 기능에 의거해 노래했을 때 최고의 시편은 탄생한다. 운문으로 쓴다고 다 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서정시는 소리와 뜻 사이의 망설임이다. 소리와 뜻, 음률성과 의미 사이의 조화로운 균형을 통해 세상과 사람살이를 노래해야 한다.
모국어의 어휘 모두가 <가장 아름다운 우리말>이 되어버린 사람이 시인이다. 문체는 산문의 시라고 할 수 있고 언어 예술가라는 점에서 모든 문인은 시인이라고 할 수 있다. 세세한 차이에 대한 감각과 지각을 기르는 것은 우리에게 막중한 기율 훈련이다. 모든 예술은 향수자에게도 하나의 '도'이다. 토씨 하나 구두점 하나로 시가 살기도 하고 절딴나기도 한다.
유종호 교수의 시론을 읽었다. 좋은 시를 쓰기 위한 시인의 자세를 체득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해야 하는지 안다. 주체적 독자가 되기 위해서도 마찬가지다. 열 겹 스무 겹 얽혀 있는 시를 알아보는 혜안을 가지고 싶고 그런 시를 쓸 수 있는 자질을 갖추고 싶다. 토씨 하나, 구두점 하나라도 허투루 쓰지 않는 신중함과 뮤즈의 앙갚음을 두려워할 줄 아는 시인이 되고 싶다.
시를 불러들여 신명 나는 잔치를 벌이고 싶다.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는 시를, 만나고 싶다. 그리고 그의 일부가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