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번째 연극
연극이나 뮤지컬 같은 공연은 첫공 올리기 한 두 달 전에 몇 주 치 스케줄을 공개하고 예매를 한다. 이번 표도 8월 초에 잡아둔 것인데 9월 중순에 보러 왔네. 진짜 오래 기다렸다. (한 달이면 그리 오래 기다린 것도 아닌데 많이 기대했나보다.) 우선, 나는 <고도를 기다리며>도 보지 않았다. 기억하기로는 올해 초 동네에서 공연을 했었는데 그땐 공연을 보러 다니지 않았었어요...이게 웬일 <고도를 기다리며>극이 어렵댄다. 찾아보니 고기기도 어려운 극이란다. 급하게 관련 정보들 이것저것 찾아보고 관극했다. 고기기는 신기하게 고정페어라 페어가 안 바뀜. 관극러들이 주로 스트레스 받는 '페어 맞추기'를 할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다. 에스터 역에 곽동연, 밸 역에 박정복, 로라 역에 정재원이었다.
에스터와 밸이 <고도를 기다리며>를 기다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들은 '언더스터디'이기 때문이다. 언더스터디란 '대역 배우'를 뜻한다. 공연을 원캐로 진행하던 시절엔 긴급 상황에 대비해 한 역할에 대역 배우가 한 명 씩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요새는 더블, 트리플, 쿼드까지 캐스팅이 있기 때문에 언더스터디를 굳이 고용할 필요가 없다. 있더라도 공연이 중단될 만큼의 위급상황이 아니라면 언더스터디가 무대에 오를 필요가 없다. 맡은 역할을 완벽히 연습했더라도 말이다. 올 지 안 올 지 모르는 것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부분이 <고도를 기다리며>와 상통한다. '기다리면 온다'는 옛 말이다. 기다려도, 노력해도 오지 않을 것은 오지 않는다. 때가 아닐 수 있다. 한참 뒤에 올 수도 있다. 우선, 기다리는 지금 이 순간엔 내 곁에 없다.
나 꿈한테 죄 지었니...중반부까지는 공연 전반에 깔린 해학 덕에 깔깔댔는데 후반부 와서 우는 사람이 돼...에스터가 화장실 간 사이에 밸이 에스터의 신발을 신고 탭댄스를 추는 장면이 있었는데 밸 눈빛이 아이 같아서...순수한 사람에게 세상이 무슨 짓을 하나 싶어서 울컥했다. 이후에 둘이 앉아 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데 속으로 네네...(끄덕) 네네....(끄덕) 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본 적 있었나. 마음을 다해 기다린 적 있었나. 소중한 것을 포기하며 꿈에 다가간 적 있었나 같은 질문들. 질문들을 고민하고 있을 즈음, 분위기가 바꼈고, 큰 사건으로 인해 다시 한 번 분위기가 반전되었다. 이후, 에스터와 밸이 무대를 준비하는데 이 무대가 정말....귀한데.....아 생각하니까 또 눈물나....
에스터에게 신발이 맞지 않는다는 설정이 재밌었다. 사실 에스터가 신으려던 신발은 에스트라공 배우의 신발이었다. (나오진 않았지만 에스터가 훔쳐서 신은 느낌) 로라가 물어도 그것은 자신의 신발이라며 억지로 발을 우겨넣어 본다. 신기한 건 그렇게 우겨넣어도 들어가지 않던 신발이 밸에게 맞았다는 것이다. 밸이 잘 될 것이라는 복선을 두었다고 생각했는데 한 번 더 꼬아서 엔딩을 냈지. 왜 이리 눈물겹지. 인생이.
재원 배우부터 이야기하자면 주인공에 비해 분량이 적지만 그만큼 임팩트가 있었다. 두 언더스터디를 자극해서 열의에 불타게 하는? 상황 전환이 필요할 때 등장하는 인물이기도 했고. 고지식하지만, 자신이 맡은 일에 자신감이 엄청 강한 편이다. 그게 꼿꼿한 말투에서 다 드러남. 연기 좋았어요!
동연 배우는 1년 반 만에 다시 무대에서 봤다. 왜 더 늘어있는 것인지...왜 이런 꼰대 역할까지도 어울리는 것인지...영화 캐릭터들 이어 이어 연기하는 거 진짜 미친 줄 ㅋㅋㅋㅋㅋㅋㅋㅋ 고릴라에 골룸에 아주 그냥 ㅋㅋㅋㅋㅋㅋㅋㅋ동시에 자신의 감정에 솔직한 인물이었다. 어떤 감정인지 말과 행동으로 다 드러나는? 상황이 이렇다보니 열등감으로 똘똘 뭉쳐있기도 했고. 그런데 마지막에 다 해소해주셨어요. 그냥 우리네 인간이었다. 정복 배우는 <아트> 때부터 보고 싶었는데 이제야 자첫....엉엉.....다들 왜 볶볶을 외쳐대는지 알겠군요. 딕션이랑 성량이랑 아주 그냥 인간 집중력 기계임 ㅇㅇ 커피 사올 때, 에스터한테 연기 배울 때, 소속사랑 계약했을 때...하나 하나 말하기 입 아플 정도로 감정이 좋다. 위에서 말했지만 그의 아이같은, 희망찬 눈빛이 참 마음에 든다. 뒤에 따라올 슬픔이 더 아프게 닿으니까.
다 보고 나오면서, 곽볶페어 꽤나 안정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 그럴까 머리를 굴려보니 생김새도 비슷하고, 대사톤도, 성량도, 감정 결도 다 닮았다. 아 이래서~붙여 놨구나 싶었다. 저 아직 못사인데 두 사람 엘송에서도 붙어다녔다면서요! ((둘이 엘송 한 번 더 해달라는 이야기)) ((나아가 둘이 계속 무대하세요 제발 제발)) ((그런 연기는 계속 무대해야 돼 정말임))
<틱틱붐>도 그렇고 인생 권태기 온 지 어떻게 알고 이리 따스한 작품들이 나에게 찾아 왔을까. 당근만 주지 않아서 더 따뜻하다. '세상이 네게 이러 이러하게 모질게 굴어도 너는 할 수 있어. 나쁜 일만 있는 거 아니야' 라고 말해주는 작품들 최고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낍니다.
보고 나오면서 아 이 페어로 한 번 더 보고싶다....그런데 다른 페어로도 보고싶다. 다른 페어는 에스터가 고령이고 밸이 많이 젊거든요. 거기서 오는 케미는 어떨지 궁금해졌다. 하지만 내겐 돈이....;-; 내려가기 전에 한 번 더 볼 수 있음 소원이 없을텐데....좋은 극이에요 정말. 추천 추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