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회(無悔)의 빗물을 쏟다
암술과 수술에 꽃밥이 수정되고 바람을 타고 흘러 씨앗이 날린다.
이윽고, 맞닿은 토지에 뿌리가 내리고
이내 풍파와 세월을 견뎌 내고 꽃은 자라난다.
아스팔트들이 가득한 도시.
우리들은 그곳에서 자라나 버리고 말았다.
이미 자라난 우리들은 태어난 것을 후회하고 삶을 초라하게 바라본다.
거대한 아스팔트 숲 안엔,
주종관계는 이미 정해져 있다.
우릴 위해 정해진 급여와 인생의 골자들은.
하루하루 늙어가는 여정 속에 이미 정해진 시간표처럼 흘러간다.
잡을 수 없고 놓을 수 없는.
이미 강한 포식자가 정해 놓아,
그들의 마음에 따라 움직인다.
파내려고 하면 파내여지고.
자라나려 하면 자라나 진다.
무엇하나 우리가 정할 수 있는 것은.
단 한 가지도.
없다.
그저 한 가지 있다면.
내가 우리가 되고.
하나가 아닌 둘이 되어.
씨앗을 바람에 흩날리는 것뿐.
선택권은 이미 우리에게 없던 것이다.
그런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도대체 뭘까.
비관적인 시선으로 세상을 날카롭게 찢어,
생채기하나라도 줄 수 있는가.
돈이라는 계급체계 속에 놓여 포식자들의 눈을 피해
유약한 존재들이 태양빛을 받지 못하게 막을 것인가.
추하고 추하다.
처음부터 바라보자.
우린 선택권이 없었다.
태어나려 하지 않았고,
태어나졌다.
그렇다면 우리가 자라나기 위해 갖춘 영양분은 무엇이 있을까.
우린 곪은 것들을 빨아먹었다.
썩은 것에서 흘러나오는 진물과 썩어 문 들어져
가는 형태가 없는 것을 빨아먹어 버리고 말았다.
그러니 온전히 자라나지 못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근본적인 문제라고 볼 수 있지만.
태생적으로 문제라고도 볼 수 있다.
우린 잘못 자라 나 버리고 말았다.
내가 원한 것이 아닌.
타인에 의해 잘못 자라나 버리고 만 것이다.
그 사람들을 바라보며 눈치를 주고 쌀쌀맞게 그들을 대할 것인가?
아니다. 그건 좋지 않은 방법이다.
그런다 한들, 잡초가 장미가 될 순 없다.
그렇다면 방법이 아예 없으니,
존속되어 살아가라는 뜻일지도 모르겠다.
다만 할 수 있는 것 하나만큼은 해야겠다.
골똘히 생각에 잠긴 동안 난 정의에 대해 떠올렸다.
우릴 바라보며 잡초라고 떠들어 대는 것들을 무시한 채,
나 자신을 장미로 정의한다면.
난 장미가 될지도 모르니까.
타인의 시선은 매우 중요하다.
모든 사람들이 타인의 시선을 무시한 채 살아가라라고 떠들어 댄다.
그것은 무인도에서 홀로 사는 것만큼
외롭고 힘든 일임은 모른 채 입 밖으로 꺼낸다.
얼마나 책임 없는 일인지.
잡초를 장미라고 생각하는 것만큼
책임감 없는 일은 아니지 않으냐 라는 질문이 올 수도 있다.
하지만 내 말을 들어 본다면
생각이 달라 질지도 모른다.
우린 풀이다.
우린 아무렇게나 자라난다.
그렇기에 희망이 있다.
위치를 달리 해야 한다.
바위틈 사이 자라난 잡초.
축구장 안의 자라난 잡초.
사막 위에 자라난 잡초.
약을 품은 잡초.
독을 품은 잡초.
세상에 너무나 많은 잡초 잡초 잡초.
잡초라 하면 멋대로 이미 피어버린 존재를 말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우린 멋대로 피어나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태어나졌으며.
누군가에게 교육을 받았다.
누군가와 하나가 되길 강렬히 희망하며.
때론 홀로 있길 원한다.
멋대로 자라난 강인한 생명력을 가진 잡초임을 알고 있지만.
우린 멋대로 자라난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사회라는 울타리는 우리를 길거리에서 객사당하지 않게 도와준다.
위험을 겪을 땐 경찰을 부를 수 있다.
다쳤을 땐 병원에 갈 수 있으며.
엄연히 우린 사회의 굴레 속 하나의 재료가 되어 한자리 매김하고 있다.
누군가 나를 무시하지 않는다면.
세상 속 우리는 장미와 다를 바가 없다.
그러니 우린 장미로 명명하자.
타인이 우릴 잡초로 여긴다면.
그 또한 잡초임을 상기하며.
장미다운 잡초로.
잡초 다운 장미로.
멋들어진 이름은 필요 없다.
아무리 밟아도 죽지 않는 쇠비름.
발길에 짓밟히며 자라나는 질경이.
나라가 망할 때쯤 자란다는 개망초.
겨울도 견디고 봄에도 자라는 고들빼기.
그들처럼 어울리는 이름이 있다.
우리 또한 이름을 가지고 살아가자.
좋든 싫든 나는 영향을 받았고 꽃망울을 잉태하며 살곁이 찢어지는
고통을 받으며 추악하게 미소 지어 보이겠다.
장미들아, 날 바라봐라.
난 태어났고 잉태했다.
내 찢어지는 살결들을 바라보며.
너희들도 미소 지어라.
가장 깊은 곳의 진물을 빨아먹고 자랐을지언정,
그 독기로 피워낸 꽃망울은 그 어떤 온실 속 화초보다 진하다.
찢어진 살결은 흉터가 아니라,
아스팔트를 뚫고 나온 훈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