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은 부정하고 거짓은 긍정한다.

내 주변인들이 나에게 옳다고 한다. 무엇인가 단단히 잘못되어가고 있다.

by 민태선


우리는 이상한 시대에 살고 있다.


누군가 자신 있게 말하면 사람들이 모인다.

그 말이 사실인지 확인하기 전에, 그 말을 하는 사람의 표정과 목소리와 자신감이 먼저 사람들을 끌어당긴다.


반대로 조심스럽게,

근거를 들어가며 말하는 사람은 어딘가 자신 없어 보인다는 이유로 외면받는다.


확신의 크기가 진실의 무게를 대신하는 세상.

사실보다 태도가 더 설득력을 갖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우리는 그 세상 안에서 매일 선택을 한다.

저 말이 맞는지 틀린 지 따져보는 것과, 그냥 따라가는 것 사이에서.

대부분은 후자를 선택한다. 그게 편하고, 그게 빠르고, 그게 덜 외롭기 때문이다.


거짓이 도파민을 만든다는 것은 이제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다.


자극적인 소문, 과장된 이야기, 믿기 어렵지만 믿고 싶은 이야기들.


이런 것들이 뇌를 흥분시킨다는 것은 여러 연구가 말해주고 있다.

사실보다 거짓이 더 빠르게 퍼지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사실은 대부분 평범하고, 복잡하고, 맥락이 필요하다.


거짓은 단순하고, 자극적이고, 즉각적인 반응을 만들어낸다.

뇌는 자극을 좋아하고, 자극은 확인보다 빠르다.

문제는 그 도파민이 판단을 흐린다는 점이다.


무언가를 들었을 때 가슴이 두근거리고 빠르게 공유하고 싶어지는 감각, 그 감각이 클수록 한 번쯤 멈춰야 한다.


흥분이 크다는 것은 그만큼 자극적으로 설계된 정보라는 뜻일 수 있다.

하지만 그 순간 우리는 멈추지 않는다.


흥분이 판단을 앞질러 버린다.

그리고 공유하고, 동조하고, 그 흐름의 일부가 된다.

사실은 부정되고, 거짓은 긍정된다. 속도의 차이로.


더 흥미로운 것은 그 이후다.

처음에는 반신반의하며 동조했던 사람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의 동조를 정당화하기 시작한다.


내가 틀렸을 가능성을 인정하는 것보다, 내가 옳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쪽으로 에너지를 쓴다.

이것은 나약함이 아니라 인간의 자연스러운 심리다.


자신이 바보처럼 보이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속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계속 믿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떻게든 선을 맞추려 한다.

이미 기울어진 방향으로 해석을 끼워 맞추고, 반박하는 정보는 외면하고, 동조하는 정보만 수집한다.


자신의 판단이 옳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점점 더 깊이 들어간다.

처음에는 그냥 따라간 것인데, 어느새 그것을 지키기 위해 싸우고 있다.

이 모습이 나는 조율되지 않은 현악기처럼 보인다.


현악기는 줄의 장력이 정확하게 맞아야 제 소리를 낸다.


조금 느슨하거나, 조금 팽팽하거나, 그 미세한 차이가 음을 어긋나게 만든다.

혼자 연주할 때는 그 어긋남이 잘 들리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다른 악기와 함께 연주하는 순간, 그 차이는 바로 드러난다.

불협화음은 숨길 수 없다.


아무리 열심히 연주해도, 아무리 표정을 관리해도, 조율이 안 된 소리는 결국 새어 나온다.

사실을 확인하지 않고 동조하는 것이 바로 이 상태다.


처음에는 괜찮아 보인다.

다들 같은 방향을 보고 있고, 나만 이상한 것 같은 불안도 없다. 하지만 시간이 쌓이면 어긋남이 드러난다.

거짓 위에 쌓아 올린 판단들이 현실과 부딪히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때 가서야 줄이 잘못 맞춰져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지만 이미 많은 것을 연주한 뒤다.


더 무서운 것은, 조율이 안 된 악기가 여럿 모이면 그 불협화음이 하나의 소음이 된다는 것이다.

개별적으로는 잘못된 소리인데, 집단이 되면 그것이 마치 하나의 음악처럼 들리기 시작한다.

모두가 같은 방향으로 어긋나 있으면, 어긋난 것이 기준이 된다.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소리가 맞다고 믿는다.

밖에서 들을 때만 그것이 소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답은 단순하다. 자기 자신의 현을 조율하는 것이다.


남들의 말이 사실인지 거짓인지 모두 확인할 수는 없다.

모든 정보를 검증하며 살아갈 수도 없다. 하지만 적어도 자기 자신의 판단 기준은 지킬 수 있다.

흥분이 클수록 한 번 더 멈추는 습관.


모두가 동조할 때 혼자 한 박자 늦게 따라가는 여유.

내가 바보처럼 보일까 봐 두려워서 거짓을 붙잡는 것이 아니라,

바보처럼 보이더라도 틀렸으면 틀렸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


이것이 조율이다.


조율은 화려하지 않다.

연주를 시작하기 전에 조용히 혼자 소리를 맞추는 작업이다.

아무도 박수를 치지 않는다.


관객도 없고, 주목도 받지 못한다.

하지만 그 과정이 없으면 연주는 시작부터 어긋난다.

아무리 열정적으로, 아무리 오래 연주해도 조율되지 않은 악기는 결국 불협화음을 낸다.


타인의 말에 기대어 자신의 현을 맞추려는 시도는 언제나 위험하다.

그 사람의 줄이 제대로 맞춰져 있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군중의 소리에 맞추려는 시도도 마찬가지다.

군중이 모두 같은 음으로 어긋나 있을 수 있다.

기준은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 있어야 한다.


자기 자신의 현을 알아야 한다.

내가 무엇을 근거로 판단하는지, 어떤 정보를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흥분했을 때와 차분할 때 내 판단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이것을 아는 사람이 제대로 조율된 사람이다.

그리고 그 사람만이 불협화음 속에서도 자기 소리를 낼 수 있다.


사실을 부정하고 거짓을 긍정하는 세상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자극이 판단을 앞지르는 구조는 쉽게 바뀌지 않는다. 우리가 바꿀 수 없는 것들이 있다.

하지만 자기 자신의 현만큼은 자신이 조율할 수 있다.

매일 조금씩, 조용히, 소리를 맞추는 것.

남들의 연주에 휩쓸리지 않고 자기 음을 지키는 것.

그것이 이 소음 가득한 세상에서 제 소리를 내며 살아가는 유일한 방법이다.

조율된 악기는 어떤 앙상블에서도 자기 자리를 찾는다.


그리고 그 소리는 오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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