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제외한 나머지의 파멸을 바란다.
우리는 가끔 이상한 장면을 목격한다.
누군가 열심히 무언가를 쌓아 올리고 있을 때,
옆에서 묵묵히 지켜보다가 슬그머니 발목을 잡는 사람.
대놓고 반대하는 것도 아니고, 딱히 악의를 드러내는 것도 아니다.
그냥 조금 흔들고, 조금 깎아내리고, 조금 지치게 만든다.
그리고 그 사람이 주저앉으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자리로 돌아간다.
게를 잡아 양동이에 담아두면 흥미로운 일이 벌어진다.
한 마리가 기어 올라가려 하면 나머지 게들이 집게발로 끌어내린다.
탈출을 막으려는 의지가 있는 것도 아니고,
서로 눈을 마주치며 모의한 것도 아니다.
그냥 본능적으로, 올라가는 것을 잡아당긴다.
결국 어느 게도 통을 벗어나지 못한다.
양동이를 덮을 뚜껑조차 필요 없다.
인간 사회에도 이 양동이가 있다.
우리는 그것을 '크랩 맨탈리티(Crab Mentality)'라고 부른다.
크랩 맨탈리티의 핵심은 단순하다.
"나는 못 올라가도 좋으니, 저 사람도 올라가면 안 된다."
자신의 성공을 향해 에너지를 쏟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성공을 막는 데 에너지를 쏟는 심리다.
이것이 단순한 질투와 구분되는 지점이 있다.
질투는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는 욕망을 포함하지만,
크랩 맨탈리티는 그 욕망마저 포기한 채 오직 끌어내리는 행위에 집중한다.
더 무서운 것은, 이 심리가 종종 선의나 걱정의 언어로 포장된다는 점이다.
"그게 될 것 같아? 현실적으로 생각해봐."
"괜히 나서다가 욕먹으면 어떡하려고."
"우리 다 비슷하게 살잖아, 혼자 튀면 이상하지."
이 말들을 듣고 나면 묘하게 발이 무거워진다.
분명 나를 걱정해주는 말인 것 같은데, 이상하게도 의욕이 꺾인다.
이 감각을 의심해야 한다.
진짜 걱정은 사람을 멈추게 하지 않는다.
진짜 걱정은 같이 방법을 찾는다.
크랩 맨탈리티가 특히 강하게 작동하는 곳은 가까운 관계다.
낯선 사람의 성공에는 그냥 무감각하거나 심지어 응원할 수 있다.
하지만 내 동생이, 내 친구가, 내 동료가 나보다 앞서나갈 때 그 감각은 달라진다.
거리가 가까울수록 비교는 선명해지고,
비교가 선명해질수록 상대의 상승이 나의 하락처럼 느껴진다.
이것은 제로섬 게임의 착시다.
우리는 종종 삶을 크기가 정해진 파이처럼 인식한다.
누군가 한 조각을 더 가져가면 내 몫이 줄어든다는 착각.
하지만 현실의 대부분은 그렇게 작동하지 않는다.
친구가 좋은 직장에 들어간다고 내 취업 기회가 줄지 않는다.
동료가 승진한다고 내 능력이 깎이지 않는다.
그런데 뇌는 그렇게 계산하지 않는다.
가까운 사람의 성공은 내 상대적 위치를 떨어뜨린다는 감각을 준다.
그 감각이 집게발을 움직이게 한다.
문제는 이 심리가 집단 안에서 규범이 되어버릴 때다.
'우리끼리는 이 정도면 된다'는 암묵적 합의가 생기면,
그 선을 넘으려는 사람은 배신자처럼 여겨진다.
더 열심히 하고, 더 멀리 가려는 사람을 집단이 함께 끌어내린다.
이 단계가 되면 양동이는 외부에서 씌워지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서 만들어진다.
자발적인 통이다.
이 통 속에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아챌 수 있을까.
첫 번째 신호는 죄책감이다.
잘 되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데 그게 미안하게 느껴진다면,
뭔가 잘못되어 있다. 성공을 원하는 것 자체가 죄가 되는 환경이라면, 그 환경이 문제다.
잘 되고 싶다는 마음은 가장 자연스러운 인간의 욕구다.
그것을 억눌러야 한다는 압력이 온다면, 그 압력의 출처를 살펴야 한다.
두 번째 신호는 피로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지쳐있다면, 에너지를 소모하는 무언가가 가까이 있다는 뜻이다.
크랩 맨탈리티를 가진 사람들과의 관계는 은근히 많은 에너지를 빼앗는다.
직접적으로 싸우는 것도 아니고,
명백한 갈등이 있는 것도 아닌데 왠지 그 자리를 벗어나면 몸이 가벼워진다.
이 차이를 느낀다면 무시하지 말아야 한다.
세 번째 신호는 자기 검열이다.
좋은 일이 생겼는데 숨기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면,
그것이 기쁜 소식을 나눌 수 없는 환경이라는 뜻이다.
진짜 관계 안에서 좋은 소식은 함께 기뻐할 수 있어야 한다.
기쁨을 숨겨야 하는 관계는 관계가 아니라 전투다.
그렇다면 어떻게 경계를 만들어야 할까.
가장 먼저 할 일은 구분이다.
이 사람이 나를 끌어내리려는 것인지,
아니면 진심으로 걱정하는 것인지.
그 기준은 하나다.
그 말을 들은 뒤에 내가 더 명확해지는가,
아니면 더 혼란스러워지는가.
진짜 피드백은 방향을 잡아준다.
크랩 맨탈리티에서 나오는 말은 방향을 잃게 만든다.
두 번째는 거리다. 심리적 거리를 먼저 만들어야 한다.
모든 말을 다 흡수하지 않아도 된다.
특히 반복적으로 의욕을 꺾는 말을 하는 사람에게는,
중요한 계획을 먼저 공유하지 않는 것이 좋다.
이것은 불친절한 것이 아니다.
아직 연약한 씨앗을 밟힐 곳에 두지 않는 것이다.
세 번째는 선택이다.
같은 에너지라면 끌어내리는 사람보다 끌어올리는 사람 곁에 있어야 한다.
이것이 냉정하게 들릴 수 있지만, 우리는 모두 환경의 영향을 받는다. 주변 사람들의 언어가 내 내면의 언어가 된다.
내 가능성을 믿는 사람들의 말이 내 귀에 더 많이 들려야 한다.
크랩 맨탈리티를 가진 사람들을 미워하는 것으로 이 글을 끝내고 싶지 않다.
그들도 대부분 어느 양동이 안에서 오래 살아온 사람들이다.
올라가려고 했다가 끌려 내려온 경험이 있는 사람들.
그래서 올라가는 것이 가능하다는 믿음 자체를 잃어버린 사람들.
그 안에서 생긴 논리가 "어차피 안 된다, 나만 안 되는 게 아니다"이다.
이것은 악의보다는 절망에 가깝다.
그러나 그들의 절망을 이해하는 것과,
그 절망에 동참하는 것은 다르다.
우리는 그들의 아픔에 공감하면서도,
그 아픔이 나에게 전이되지 않도록 막을 수 있다.
연민은 경계와 함께 있을 수 있다.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의 질문이다.
나는 지금 올라가려고 에너지를 쓰고 있는가,
아니면 누군가를 끌어내리는 데 에너지를 쓰고 있는가.
통 밖을 본 적이 있는 게는 안다.
올라가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그리고 그 가능성을 붙잡은 발을 아무도 잡지 않기를 바란다.
만약 누군가 잡는다면, 그때는 조용히, 단호하게 발을 빼야 한다.
통 안에 남아 함께 가라앉는 것은 아무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