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이 나왔다. 그런데... 왜지?

질문위에 질문을 쌓는 영원한 수레바퀴.

by 민태선

우리는 답을 원한다.

언제나, 빠르게, 깔끔하게.


누군가 질문을 던지면 뇌는 즉시 가장 가까운 서랍을 열어 그럴듯한 대답을 꺼낸다.

그 속도가 너무 빨라서, 우리는 그것이 진짜 생각인지 그냥 습관인지를 구별하지 못한다.

그런데 잠깐. 그 답은 어디서 왔는가.


어릴 때부터 들어온 말들. 반복해서 읽은 문장들. 누군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해줬던 것들.

우리가 '내 생각'이라고 부르는 것들 중 상당수는, 사실 내가 만든 것이 아니다.


어딘가에서 흘러들어온 것들이 굳어진 것이다.

퇴적층처럼. 오랫동안 쌓여서, 이제는 원래부터 거기 있었던 것처럼 느껴지는 것들.

그렇다면 다시 물어야 한다. 그 답은 정말 내 것인가.

사람들은 확신을 신뢰의 증거로 본다.

흔들리지 않는 사람을 강한 사람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이, 깊이 생각했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일 수 있다. 한 번도 의심하지 않은 것들은,

의심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할 만큼 단단하게 굳어있다.


그것은 강함이 아니라 경직이다.

살아있는 것은 흔들린다. 나무도, 물도, 생각도.

답이 너무 빨리 나올 때, 나는 그 답을 의심한다.

왜 이 답이 나왔는가.


이것이 진짜 내 결론인가, 아니면 내가 그렇게 믿도록 오랫동안 훈련받은 것인가.

이 질문이 불편한 이유는 무엇인가.


불편하다는 감각 자체가, 이미 무언가를 건드리고 있다는 신호가 아닌가.

그렇다면 그 불편함의 정체는 무엇인가.

나는 그것을 직면한 적이 있는가,

아니면 매번 다른 답으로 피해왔는가.

예를 들어보자.

누군가 배신을 당했다.

분노가 치밀고, 마음속에서 판결이 내려진다.

저 사람은 나쁜 사람이다.


이 답은 빠르고 명확하다.

틀렸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하지만 여기서 멈추지 않고 물어보면 어떻게 될까.


왜 나는 저 사람을 나쁜 사람이라는 결론으로 곧장 달려갔는가.

그것이 가장 편한 답이기 때문은 아닌가.


상대를 나쁜 사람으로 규정하면, 나는 피해자가 되고, 피해자는 아무것도 돌아볼 필요가 없어진다.


그 결론이 나를 편하게 해주기 때문에 선택된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내가 진짜로 분노하는 대상은 그 사람인가, 아니면 그 상황을 만든 나 자신인가.

나는 그 질문을 꺼내기가 두렵기 때문에, 분노를 바깥으로 향하게 한 것은 아닌가.


이 질문이 배신한 상대를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내가 내린 결론의 출처를 묻는 것이다.


그 답이 진실에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내가 원하는 것에서 나온 것인지를.

그리고 그 둘을 구별하는 일이, 왜 이렇게 어려운지를.

우리는 생각한다고 믿지만, 사실은 느끼고 있는 경우가 많다.

감정이 먼저 결론을 내리고, 이성이 나중에 그 결론을 설명하는 논리를 짜맞춘다.


그것을 사후 합리화라고 부르지만, 일상에서는 그냥 '내 생각'이라고 부른다.

누구도 자신이 합리화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이 합리화의 가장 정교한 부분이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이 가능하다.

나는 지금 생각하고 있는가, 느끼고 있는가. 이 결론은 내가 도달한 것인가,

내가 원했기 때문에 끌어당긴 것인가. 만약 반대 결론이 나왔다면,

나는 그것도 받아들일 수 있는가. 받아들일 수 없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이유가 논리인가, 두려움인가.

마지막 질문이 가장 중요하다.

어떤 답이 나오든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을 때만, 그 질문은 진짜 질문이 된다.

원하는 답을 확인하기 위한 질문은, 질문이 아니라 확인이다.

그리고 우리는 하루에도 수십 번, 질문인 척하는 확인을 반복한다.

어떤 사람은 말한다.

너무 많이 생각하면 삶이 피곤해진다고.

맞는 말이다. 모든 것을 의심하며 사는 것은 불가능하고,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이런 생각이 든다. 피곤하다는 그 감각, 그것은 어디서 오는가.


생각이 많아서 피곤한 것인가,

아니면 생각하지 않으려고 버티는 데 에너지를 쓰기 때문에 피곤한 것인가.

외면하는 것도 결국 힘이 드는 일이다.

다만 그 피로는 어디서 오는지 보이지 않을 뿐이다.

답을 도출하지 않는다는 것은, 결론을 포기한다는 뜻이 아니다.

결론이 너무 빨리 나왔을 때, 그 결론을 다시 입구에 세워두는 것이다.

들어오기 전에 한 번 더 검문하는 것.


이 답은 어디서 왔는가.

무엇이 이 답을 만들었는가.

이 답이 편한 이유는 무엇인가.


불편한 답은 왜 떠오르지 않았는가.

그리고 그 불편한 답이 사실에 더 가까운 것은 아닌가.

질문은 답보다 오래 산다.

좋은 답은 시간이 지나면 낡아서 바뀌지만,

좋은 질문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깊어진다.


어떤 질문들은 평생 답이 나오지 않은 채로,

그 사람의 생각 속에서 계속 살아 움직인다.


그리고 그 움직임이 그 사람을 살아있게 한다.

답이 없는 질문을 품고 사는 것, 그것이 사유하는 삶의 실제 모습이다.

나는 답을 원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다만 답이 나왔을 때, 거기서 멈추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 답 뒤에 무엇이 있는가. 이 답이 나를 어디로 데려가는가.


이 답에 기대는 것이 나에게 어떤 의미인가.

이 답이 없어진다면, 나는 무엇에 기대는가.

그리고 그 기댐이 사라졌을 때, 나는 여전히 서 있을 수 있는가.

답은 도착점이 아니다. 다음 질문을 위한 출발점이다.

세상에 정답은 없다고 말하는 것은 허무주의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정답이 있다고 믿는 순간, 질문은 멈춘다.


그리고 질문이 멈춘 자리에서, 생각도 함께 멈춘다. 멈춘 생각은 굳는다.

굳은 생각은 세상을 보는 창문을 닫는다.


그리고 우리는 그 닫힌 창문 안에서, 바깥이 달라진 것도 모른 채 살아간다.

그러니 다시 묻는다.


지금 네가 가진 그 답, 그것은 정말 네 것인가.

그 답이 나온 이유를 너는 알고 있는가.

그 이유 뒤에는 또 어떤 이유가 있는가.


그 이유를 끝까지 따라가면, 마지막에 무엇이 남는가.


그리고 그것이 남았을 때,

너는 그것과 마주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답하지 않아도 된다. 다만 묻는 것을 멈추지 마라.

작가의 이전글풀이가 틀렸던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