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깜짝할 새 한 해가 지나고, 새로운 달도 어느덧 중반을 향해 가고 있다. 최소 2주에 한 번은 정기적으로 글을 써보겠노라 굳게 했던 다짐도 연말연초 밀려드는 일정과 들뜬 마음에 희석되어 버렸다.
마음을 다잡는 의미에서 하반기의 취향도 한 번 정리해 보고자 했으나 도무지 뭘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아 사진첩을 훑어보았다. 텅 빈 기억이 무색할 정도로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부지런히 먹고, 돌아다니고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났던 순간들 - 더더욱 기록의 소중함을 느끼며 25년 하반기의 취향도 기록해 본다.
25년 하반기의 공연 : 라이프 오브 파이
나의 인생 책, 인생 영화 '파이이야기'에게 드디어 새로운 콘텐츠가 생겼다. 한국 초연 공지를 보자마자 망설임 없이 예매했고, 공연 날짜가 가까워져서야 주인공이 당시 화사 공연으로 핫했던 박정민 배우인 것을 확인했다. 17세 파이를 하기엔 너무 나이가 지긋하다곤 생각했지만... 그의 연기력이 커버해 줄 것이라 믿었고, 다행히도 전 세계 최고령 파이는 무대 위에서 땀과 눈물을 아낌없이 쏟아내며, 불안하고 철학적인 소년 파이를 완벽하게 해석해 냈다.
다양한 동물들과 작품 특유의 환상성이 어떻게 표현될지도 궁금했는데, 실제 동물의 골격을 바탕으로 제작된 퍼펫(Puppet)의 정교한 움직임, 별빛이 쏟아지는 망망대해를 표현한 무대 장치, 그리고 웅장한 음악이 어우러진 무대는 ‘파이 덕후’의 기대를 충분히 만족시켜 주었다.
책이나 영화와 비교하면 서사와 캐릭터가 다소 평면적으로 느껴지는 아쉬움은 남지만, “당신은 어떤 이야기를 믿을 것이냐”라는 작품의 핵심 메시지를 떠올려보면 이 또한 의미 있는 재구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25년 하반기의 여행 : 공주
한 번도 안 가본 곳을 계획 없이 가보자는 지인들의 제안으로 날 좋은 가을날 방문한 도시. 옆동네 부여의 기억도 좋았던 터라 내심 기대했는데 예상보다 더 좋았다.
도시의 주요 키워드는 [(먹는) 밤, 고양이, 서점]
제철을 맞은 밤은 모든 카페와 식당에 포진되어 있어 원 없이 먹을 수 있었고, 공주 사람들은 달달하고 포슬한 밤처럼 친절하고 느긋했다. 도시를 가로지르는 제민천 주위로 독립 서점과 소품샵들이 몰려있었는데, 컨셉이 다양해 보는 재미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공주 페이 20% 적립이 강력했다. 요즘 세상에 책을 20% 할인받아 살 수 있다니..(쇼핑할수록 페이가 계속 쌓여서 못 떠날 뻔했다.)
키워드만 봐도 알 수 있듯이 도시 전체가 여유롭고 한적한 느낌이라 마음이 편했고, 세계 유산인 공산성을 포함하여 관광지와 맛집이 몰려있기 때문에 뚜벅이 여행자들에게도 강력 추천하는 바이다.
25년 하반기의 음식 : 두바이 쫀득 쿠키
26년 1월 15일 현재 기준, 거의 두 달간 나를 시험에 들게 하는 요물 같은 간식되시겠다. 생각해 보면 허니버터칩이나 탕후루, 요아정 등이 난리가 났을 때도 디저트에 크게 감흥 있는 편은 아니라 대세에 휩쓸린 적이 없었다. 그런데 어쩌다 먹어본 요상한 간식에 취향저격을 당해버렸고, 그날 이후 두쫀쿠 헌터가 되어버렸다.
두쫀쿠를 직접 만들어보는 사람들, 원정까지 떠나며 구매 후기를 남기는 콘텐츠를 보는 것도 재미있고, 치솟는 가격 때문에 어느새 물물교환의 기준처럼 이야기되는 사회 현상도 흥미롭다. 또한 여성들이 선호하는 디저트라 가격이 더 붙는다는 이른바 ‘핑크택스’ 논쟁 역시 그냥 넘기기엔 생각할 지점이 많다.
전국적 유행을 따른다는 건 이런 재미가 있구나라는 걸 느끼면서도, 돈이 있어도 먹고 싶은걸 못 먹는 상황에 열받기도 하는 요즘이다. 저렴하게 원 없이 먹고 싶어서 유행이 얼른 끝났으면 하면서도, 어차피 유행이 끝나면 나 또한 흥미를 잃게 될게 뻔할 테니 지금을 최대한 즐겨봐야겠다.(오늘도 두쫀쿠 티켓팅한다는 뜻)
25년 하반기의 역할 : 팀장
급격한 조직 개편 흐름 속에 9월부터 얼레벌레 팀장이 되었다. 팀장을 하며 산전수전 겪었던 전 회사를 떠나오며 다시는 리더는 하지 않겠노라 다짐했지만, 자고로 조직 생활이란 내가 결정할 수 있는 건 별로 없는 법이다. 자발적인 선택은 아니었지만 맡은 바 책임은 다 해야 했기에 몇 년 전 경험을 더듬으며 교육을 받고, 면담을 하고 평가를 하며 정신없는 시간을 보냈다. 그래도 짬이 있으니 금방 적응하겠지라고 자만했지만 다른 직군의 인원들을 관리한다는 것을 너무 우습게 봤던 것 같다. 상대에 대한 이해가 충분하지 않은 상태에서 내린 결정들은 크고 작은 갈등으로 되돌아왔고, 그 과정에서 스스로에 대한 실망과 한 발 물러서고 싶다는 충동이 반복해서 고개를 들었다.
그러데 이 사건(?)을 왜 취향 영역에 넣었나요?라고 한다면, 뒤치다꺼리하던 역할과 비교하자면 팀장 역할이 더 맘에 든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나는 '겸손이 미덕'이라는 틀에 갇혀, 어떤 일을 할 때 가장 나다운지, 내면의 욕구가 어떤 것인지를 애써 외면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25년 하반기,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역할 취향'을 깨달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