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의 반역> 오르테가 이 가세트
그 시절 뭔가를 해야 한다는 강한 압박 속에서 청춘을 보냈다. 모든 개인적인 욕구조차 부정하며
집단적 의식을 떠나서 개성과 취향은 생각하기 힘들었다. 부르주아 문화에 대한 반감이 퍼져 있었고
그림은커녕 운동가를 부르며 감정을 해소해야 할 뿐이었다. 헌신적인 자세로 혁명을 통해 사회를
변화시킬 것이라는 주장과 실천가들에게 경도되었기 때문이다.
그 영향력에서 벗어나는데 시간이 걸렸고 고통스러웠다. 나보다 세상을 더 알지만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해 견디고 살아가는 삶이 실제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도 미력한 존재에 불과했으니 역사의
물줄기에 몸을 싣고 어느 기슭엔가 뿌리를 내리고 싶었다. 결혼 후 아이들을 낳고 키우면서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되고 다시 그림을 그리고 싶은 마음이 조금씩 차오르게 되었다. 나도 대중이 될 뻔했으나
자연스럽게 개인적으로 각성된 삶을 살기까지 먼 길을 돌아왔다.
과거와의 단절이나 부정적인 입장이 과연 옳을까? 어떤 식으로 포장해도 세상에 미치는 영향은
악하다. 프랑스혁명과 사회주의 이념을 실현한 공산주의 국가들이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보겠다며
일으켰던 엄청난 피바람을 보라. 법치를 넘어서 '정의'를 독점하려 드는 정권은 다 그 부정적 잔재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노동 귀족이라 할 만한 사람들이 이념에 도취된 채 국가 전체를 생각하지 않고
오직 집단의 이해관계만 따지고 권리를 주장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성적 의견 제시와 대화(토론)를
통한 합의를 하지 않고 폐쇄성을 띤 채 직접적 행동으로 나서고 있다. 오르테가가 지적한 대로 모든
수단과 방법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불법과 폭력이 늘 전면에 등장한다면 법과 절차를 무시한 야만성이
아닌가?
1930년 대 스페인 철학자 오르테가는 사회의 중추 세력으로 부상한 대중에 대한 사회론을 통해 당시
유럽의 기이한 현상을 진단하고 있다. 19세기 말 프랑스의 좌익 기회주의의 일종으로 조합만을 유일한
노동자 조직으로 간주하고 의회의 역할을 부정하며 총파업에 의해 정부를 쓰러뜨리고 노동조합이 생산의
권리를 장악해야 착취 없는 자유로운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하는 생디칼리즘과 파시즘 같은 정치운동의 위험성을 보여 주었다. 현대적 삶의 기술만 알 뿐 과거부터 쌓아 온 문명에 대한 학습이 제대로 되어있지
않은 사람들이 제 권리만 주장하는 데 급급하고 사회적 존재로서 자신이 해야 할 직무에는 무관심할 때
혼란이 초래된다. 아직 개인으로서의 자기 관점을 지니지 못한 대중인(大衆人, homobre-masa)이 '떼'를
이루고 세력화될 위험을 경고한 셈이다.
당시 유럽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오르테가가 교양 있고 지적으로 독립적인 소수에게 사회의
지도권을 넘겨줘야 한다는 입장을 취한 것은 귀족주의적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오르테가도 대중의 출현을
역사의 발전과정에 긍정적인 측면으로 인정했다.
"대중의 지배는 전반적인 역사 수준의 상승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바람직한 측면을 지니고 있고,
또한 평균 생활 수준이 과거보다 향상되었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는 삶에 서로 다른 수준의 높이가 있다고 하면서 19세기는 대만족의 시대였지만 내부로부터 죽어갔다고
진단한다. "생의 진정한 절정은 만족과 성취, 도달에 있는 것이 아니다. 세르반테스는 일찍이 '여행길이
여관보다 언제나 좋은 법이다'라고 말했다." 그의 통찰이 뛰어난 문장이 아닐 수 없다.
현대 세계는 그 어느 때보다도 더욱 많은 자산과 지식과 기술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불행한 시대처럼 표류하고 있다는 그의 생각은 나치 정권처럼 전체주의 사회가 도래할 가능성과 2차 세계대전을 내다본
것으로 여겨진다. 유럽은 이상을 실현할 엄청난 능력을 자랑하는 시대이긴 하지만 정작 무슨 이상을 실현해야 할지 모르는 정신적 위기와 불확실성, 불안이 사회 전반에 도사리고 있었다. 정신과 도덕이 붕괴되고 서구가 몰락할 수 있다는 의식에서 쓰인 글이지만 오늘날 우리에게도 과거의 교훈을 되짚어 보게 만든다.
매너리즘에 매몰된 상황 속에서는 진실을 추구하기가 힘들다. 삶을 대하는 자세에서 일탈이 때론 긍정적인
힘을 지닐 수 있다. 세상을 어느 정도 이해해서 다른 방식으로 나아갈 여지, 자유로움을 주기 때문이다.
문제는 지적 폐쇄주의다. 인간은 내면에 관념의 창고를 갖고 있는데 그 관념들에 만족하면서 자신이 지적으로
완벽하다고 생각한다. 불행하게도 그것은 허영심에서 나온다. 오르테가가 천재와 바보의 차이를 설명하는
대목이 흥미롭다. 눈앞에 닥친 어리석음을 피하기 위한 노력 속에 지성이 존재한다. 반면 반지성주의는
자기 자신을 의심하지 않고 분별력이 뛰어난 것처럼 생각하며 어리석음 속에 부러울 만큼 평온하게 안주하는 것이다. 아나톨 프랑스가 어리석은 사람이 사악한 자보다 훨씬 나쁘다고 말했던 것은 악당은 이따금 쉴 때도 있지만 어리석은 자는 전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견해를 갖는다는 것은 그에 대한 근거를 갖는다는 말이고 개념적인 진리의 세계인 이성이 존재한다고 보는 것이다."
"문명이란 힘을 최후의 이성으로 환원시키려는 시도와 다르지 않다."
"공적 권위는 다수와 다르게 생각하고 느끼는 사람들도 살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자신의 전능한 권력을
제한하거나 심지어 희생을 감수하면서도 자신이 통치하는 국가 속에서 다른 가능성을 남겨 두려고 한다."
대중이 자신에게 속하지 않은 자들과 공존을 원하지 않고 자신이 아닌 모든 것을 필사적으로 싫어한다는 데 문제가 있다. 그의 말대로 우리 사회의 진영 싸움은 반대 세력과 공존할 수 있는 자유민주주위의 유연성을
상실한 증거다. 우리는 타인을 고려하려는 기본적인 욕망과 공존의 의지가 가장 강하게 표현된 자유민주주의의 가치를 지켜나가야 한다. 인간 존재가 세계의 안내를 받고 산다는 것은 세계와 관계를 맺는 것이다. 이제
평균인으로서 대중은 어떤 특별한 원인에 의하지 않고 생득적인 상태로 평등하며, 삶의 완전한 자유와 여러
가능성 앞에 놓여 있다. 그러나 스스로 자기 삶의 주인이라고 생각할지라도 인류 문명이 쌓아온 규범과 가치를 존중할 필요가 있다. 자유민주주의도 각 개인의 도덕성과 책임의식에 기반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다양하고 이질적인 사회에서 우리가 협력하고 애써서 건설해 가야 하는 정치체제임을 더 말할 것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