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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규원 Aug 12. 2022

고뇌와 열정 그리고 정직함

<안티크리스트> 니체, 박찬국 역 / 대우 학술총서


사람들은 진짜로 믿지 않는다. '주여 주여' 입으로 말하지만 신앙이 있다고 하면서

하느님의 존재를 무조건 믿고 의심하지 않는다는 것이 중요할까? 세상을 보면서 정말

신이 있는지 의심하는 것이 정직하지 않은가? 진정으로 믿음이 있다면 하느님의 존재에

대한 고뇌와 열정이 필요하다. 그것은 또한 자기

인샹에 대한 고민과 좌절, 실존적인

몸부림이기도 하다.


니체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죽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라는 교리 자체가 무슨 중요성이 있단 말인가? 모든 인간에게

복음서가 '기쁜 소식'인 이유는 산상수훈에서 진정한 삶과 영원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길을 발견하도록 해 주기 때문이다.

예수는 요한복음서에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말했다.

또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라고 말했을 때 그 의미는 무엇일까?

우리 '마음속에' 있다거나 사람들 사이에('among') 있다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사랑 속에', '사랑 속에서 사는 삶' 속에 있다는 것이다.



십자가에 매달린 죽음은 끔찍할 뿐 아니라 수치스러운 죽음이었다. 예수는 하느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단 말인가! '신이 어떻게 그러한 일을 허용할 수 있었을까?'라는 터무니없는 물음이

대두된다. 니체는 예수의 참된 정신과 제도화된 교회의 심판과 재림, 희생의 교리에 대해 부정적이다.

'부활'이라는 바울의 소식은 다 거짓이라고 한다. 원한과 무력한 복수심이 바울의 서신들에

나타나 있다고 비난한다. 노예였던 유대인들이 스스로를 '선민'으로 여기고 선하고 의로운

자들의 공동체로 여기는 것도 큰 재앙을 불러온 과대망상이다.


니체가 이 책에서 그려내고 있는 기독교는 기독교의 전부가 아니다. 그가 죄 많고 열등하고

보잘것없는 나약한 노예의 도덕이라고 비판한 근거는 그의 사상이 '힘에의 의지'에 기반하고

약한 것을 혐오하기 때문이다. 당시 기독교가 최고로 부패한 모습으로 비치고 해로운 종교라는

낙인을 찍게 된 이유를 부정할 수  없다. 죽어서 천국에 간다는 위로는 나약함을 고착시키고

삶에 대한 적극적인 의지를 갖지 못하게 만들 수 있다. 그러나 하느님과 성서를 전체적으로 다

이해하지 못하고 시대적 의식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한 점에 우리는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은 도덕적 선험적인 것에서 올바른 행동을 해야 한다고 칸트는 말했다. 그런데 니체가

보기에 칸트의 윤리학에서 최고로 치는 '선한 의도'는 인간이 실행하기 어려운 것을 하도록

요구함으로써 '죄의식'만 갖게 한다고 비판한다.

많은 오해를 받는 '정언명령'은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여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명령이다.

'모든 인격을 수단이 아니라 목적 자체로 대하라.'는 것이 바로 정언명령이다. 그래서

'네가 따르는 행위의 원칙이 보편적인 자연법칙이 되게 하라'에서 칸트의 핵심은 형식(법)의

중요성을 말한 것이다. 얽히고설킨 사건의 울타리 속에서 그 상황에 매이지 말고 결국 옳은

것을 찾아서 행하라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옳은 것은 신의 존재를 생각하지 않고서는 판단할

수 없게 된다. 모든 가치를 상대화시키는 것은 결국 거짓과 악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보편적 추상적인 사랑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길 잃은 양 한 마리를 살리려는 목자처럼

예수는 오직 구체적이고 상황에 맞게 행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임을 이야기했다.

믿음이나 사랑이나 다 우리의 올바른 판단과 행위로 나타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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