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명규원 Aug 17. 2022

노동, 작업, 행위

<인간의 조건> 한나 아렌트

사람들은 행복해지기 위해서 산다고 생각한다. 과연 행복은 인간의 가본권일까? 어느 정도 삶의 조건이

갖춰져야 가능할까? 대단히 잘못된 생각이다. 감각의 만족감과 일의 성취감과 다르다.

행복감이 스치듯이 자나 가는 순간이야 누구나 맛볼 수 있다. 칸트는 행복을 직접 목적으로 삼지 말고

행복을 누릴만한 자격이 있는 행동을 하고 인간이 되라고 했다.

아렌트는 의미와 목적을 동일시한 결과로 일어난 현대 세계의 ‘무의미성”에 대해 말했다. 그리고 행복 혹은 의미는 올바른 행위를 한 뒤에 결과적으로 따라온다는 칸트의 생각을 발전시켰다.  

‘의미’는 결코 행위의 목표가 아니다. 여기서 인간의 활동은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생존과 욕망

충족을 위한 “노동”, ‘재능’을 발휘해서 일의 재미를 느끼며 명예를 바라고 수행하는 제작 활동인 “작업”,

개인의 욕망과 필요를 넘어 공동체 속에서 어떤 대의를 위하여 하는 행동인 “행위”이다

그런데 의미는 이제 구체적 행위의 특수하고 직접적인 목표물로서 동일한 의도와 체계적인 수단에 의해

추구하게 되었다. 그 결과 의미 자체는 인간 세계로부터 분리되고, 인간은 오직 끝없는 목적의 연쇄와 함께

남겨진 듯하다. '대의'를 위하여 사는 것이 나라는 존재가 가치를 지닐 수 있다고 생각한 청춘 시절, 고민의

요체였다.

‘Chain of perpose’

어떤 행동을 진행하는 과정 속에서 과거 모든 업적이 담지한 유의미성이 미래의 목표와 의도에 의해 지속적

으로 상쇄되어 버린다. 의미가 목적으로 격하되는 순간이다. 목적 그 자체도 수단과 목적 사이의 구별이 더

이상 안전하지 못하게 되면 결국 모든 목적이 수단으로 변형되고 격하되는 것이다. 파시즘과 (스탈린식)

사회주의 체제는 개인의 자유를 말살하고 공포와 광기로 지배하는 반 정치적인 형태라 할 수 있다. 내세의

이상향을 자상에 구축하려는 성급한 시도와 인간이 의도된 목표를 가지고 역사를 만들 수 있다는 오만과

착각에 따른 비극이었다.

우리는 생존을 위한 노동에 몰두하면서 살아가지만 노동에 묶인 삶을 바라지 않는다. 이웃과 공동체를 돌아

보는 '공공성'을 발견하고 '공정성'을 지켜나가려고 할 때 올바른 삶의 자세에 수반되는 행복도 가능하다.

'의미'는 만들어질 수 없고 마치 '진리'처럼 스스로 드러나고 발현되는 것이다. 아렌트에 따르면 우리가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을 개념상 '진리'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은유적으로 말하자면 우리가 딛고 서 있는 땅이자 우리 위로 펼쳐져있는 하늘이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용인하는 것에서 '진실성'이 나온다. 올바른

판단능력 또한 사심 없이 그런 진리를 추구할 때 가능하지 않을까?

오늘도 우리의 삶은 노동과 작업과 행위 언저리에서 맴돌고 있다. 직업적인 성공이나 부에 대한 집착은

인생의 의미에 대한 우리의 감각을 그르치고 왜곡시킨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지적 고결성을 지키겠다는

기이한 열정에서 '학문'이 존재하고, 정신의 순수성을 찾는 문학과 사고를 확장하며 상상력을 자극하는 예술이 가능해진다. 만일 내가 인생에 빛을 던져주고  나에게도 기쁨을 줄 그림작업'을 할 수 있다면 보람이 있을 것이다.  

아니, 행복할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고뇌와 열정 그리고 정직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