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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규원 Oct 28. 2022

'절망'이란 무엇인가?

<죽음에 이르는 병>, 쇠렌 키르케고르 /이명곤 역

이른 아침 작은 새가 노래하며 앞집 옥상 빨랫줄에 앉았다. 허공을 가득 메운 새소리가 즐겁다. 쌀쌀한

가을 공기도 상쾌하게 느꺄진다. 요즘 내 안에 엉클어진 채 두었던 실타래가 풀려서 더 기분이 좋다.

젊어서는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더니 키르케고르의 생각을 이제야 이해하게 되었다.  


아하! 오래전 그게 바로 내 병이었구나. 시대의 아픔을 정신적으로 겪는다고 생각했는데, 이제야 병의 실체를 파악하게 되었다. 증상은 살아있으나 내면이

죽어있는 상태였다. 뭐라고 말로 표현할 수조차

없었다. 정말 괴롭고 새로운 하루를 맞이하여 살기가 두려웠다.

세상에 대해 절망했기에 삶의 의미나 목표를 가질 수 없었던 것이다. 그 청춘 시기를 되돌아보기조차 싫었지만 가끔씩 삶의 고비가 있을 때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깊은 정신(영혼)의 병이고 나를 부정하고 산을 부정한 결과 생겨난

죽음에 이르는 병이었다.

'절망'이란 자기 자신에 관계하는 '자기'의 관계가 어긋나고 '분열'된 것이라는 키르케고르의 진단이 맞다.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소설은 모국인 오스트리아에 대한 분노와 함께 인간과 예술에 대한 환멸을 독자적인

방식으로 늘어놓는다. 기존 소설의 서사구조를 뒤틀고 불쾌한 감정과 요설을 토해낸 듯하다. <몰락하는 자>에 나오는 주인공들도 바로 그런 모습을 보였는데 줄거리는 역시 간단하다.

최고의 피아니스트가 되어 완벽한 예술을 추구하려던 피아니스트 지망생들이 세기의 천재 '글렌 굴드'를

만나 좌절하게 된 이야기다. 글렌은 실제 인물과 공통점을 지녔지만 허구적 설정이 첨가되었고, 나와

베르트하이머는 자신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끼고 무너지는 모습으로 나온다.

허영과 위선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나'는 최상위급 연주자지만 자신의 꿈을 포기한다. 자기가 얼마나 잘하든 간에 절대 넘어설 수 없는 벽을 만났기 때문이다. 호로비츠에게 사사하면서 만난 글렌을 알게 되면서 죽음을

맞닥뜨리게 된 것이다. 그래서 160년 넘는 세월을 지나 세계 최고라고 하는 '스타인웨이'피아노를 시골

교사의 9살짜리에게 그냥 줘 버린다. 글렌에 대한 질투와 증오심에서 자유롭지 못했지만 끝까지 사랑하기도

하는 '나'는 절망하지만 언제까지나 그저 나 자신이기를 바란다.

'베르트하이머'는 역시나 환상적인 소리와 명징함, 맑고 깊은 울림으로 알려진 외젠 도르프 피아노를

경매장에 판매한 후 정신과학에 빠져든다.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싶어 하는 지상적인 것에 신경 쓰다가 자신의 바람에 대해 절망한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실패와 불행에 빠져 파멸의 과정을 밟으며 자살에 이른다.

인간이 세상에 태어난다는 것이 불행한 일이고 그걸 그치게 하는 것은 죽음뿐이라고 곧잘 말했듯이.

그는 자기를 상실한 상태로 다른 사람이기를 바랐다. '절망'이라는 병의 두 번째 형태이다. 베르트하이머는

자기가 봤을 때 삶이 순탄하고 잘 풀리는 사람이기를 원했다. 그것도 탁월한 존재인 글렌 굴드나 호로비츠, 구스타프 말러나 알반 베르크이길 원했으니...


반면에  몰락하는 자인 '나'는 살아남으려면 스스로를 유일무이한 존재로 소중히 여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정신적 지주(자기 자신과 관계하는 '자기')가 있기에 살아간다. 그리고 인간을 모두 유례가 없는 최고의 예술작품으로 보기까지 한다. '나'는 비록 자신의 제약과 한계를 인식한 활동 주체로서 '자기'가 있긴 했다. 

하지만 자신의 주인이 되고자 하여 자아를 스스로 만들기를 원한다고 해도 자신이 바라는 것과 같은 자기, 

부정적인 자아의 무한한 힘에 의해 형성된 새로운 자아를 획득할 수 없다. 자기 자신으로 았고자 하는 절망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정반대로 빠져드는 것 같고 결국 자신이 원하는 자기가 되지 못한다.

절망 속에서 자기 자신이고자 하는 형태는 세속적인  어떤 것에 관하여 절망한 것이고 영원한 것에 대해 

절망한 것과 같다. 자기 자신으로 있으려 하는 고통 속에서 '영원한 것'을 만나지 못한다면 절망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존재가 될 수 있을까?


'글렌 굴드'는 피아노와 한 몸이 되길 꿈꿀 만큼 연습하면서 완벽함을 이루려고 한다. 그는 다른 사람이

넘보지 못할 극단에 다다르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천재다. 사실 그의 재능이 빛날 수 있는 이유는 간절함과

끈질김이 남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완벽한 아름다움이란 인간을 옥죄는 우주의 사슬에 불과할 수도

있다. 뭔가 성취하려는 인간의 모든 노력이 실상은 은밀한 파멸 충동에 대항한 소심한 분투에 지니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작가는 말하고 있다. 이 어두운 진실을 외면할 수 없다면 예술이 위대하다고 할 수

있을까?

모든 인간이 다르고 이해하기 쉽지 않은 것처럼 예술과 예술가의 세계도 우리에게 무지한 채 남아 있다.

글렌 굴드는 세상과 거리를 둔 괴짜 혹은 결벽증 환자로 알려졌지만 예술의 절대성과 완벽성을 향한 강박증의 발로였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대중의 환희와 무관하게 그의 숭고한 자아는 바흐 연주를 통해 드러난 음악의 구조와 조화에 대한 애정으로 짐작할 수밖에 없다.


키르케고르는 '절망'의 병에 걸릴 수 있다는 가능성이 인간을 ’ 정신’ 이도록 하는 무한히 고귀하고 숭고한 

특성이라고 한다. 내가 한 인간으로서 '되어'감의 과정이 곧 '절망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가능성과

현실성, 필연성과 자유 의지 사이에 인간의 삶이 실재하기 때문이다.

"'절망'이란 하나의 통합된 존재인 인간이 자기 자신에 대해 가지는 관계 안에서 발생한 분열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과의 잘못된 관계인 '분열'이 나타날 때마다 '절망'이 발생하고 지속된다. 따라서 우리가

절망의 가능성을 근본적으로 없애기 어렵다. 인간이란 실존자체가 불안하지 않고 흔들림 없는 삶을 살 수 

없다. 절망은 존재 이유를 알 수 없는 인간의 조건이기도 하다. 그것을 인정하고 절망이 무엇인가를 올바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키르케고르는 물질 위주의 세상에서 인간의 정신성(영성)을 회복하고 자신의 근거인 하느님과 '자기'가 올바른 관계를 맺기를 바란다. 자기가 된다는 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최상의 과제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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