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이르는 병> 쇠렌 키르케고르
신앙인의 죄란 어떤 행위나 행동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존재 자체를 문제 삼는 것이다. 키르케고르는
'신 앞에 있는 개별자로서의 인간'을 성찰한다. 모든 사람은 각자가 하느님 앞에 현존한다.
그런데 신에게 가장 가까이 가려고 한다면 신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한다고 변증법적으로
접근한다. 오늘날 지식의 과잉으로 인해 혼란에 빠진 세계에서 그는 최고의 것을 발견했다든가 통찰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단언에 대해 눈물과 웃음이 절로 난다고 한다. 그 모든 지식과 이해가 인간 생활에는
조금도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또 그들의 생활 속에서 자신들이 이해한 것을 조금도 드러내지 못하고
오히려 그 반대이기 때문이다.
신앙인도 전쟁 상황처럼 자신의 목숨을 위협하거나 가족에게 위해를 가하려는 상대를 막기 위해서는
살상도 피할 수 없다. 인간이 처한 상황을 떠나서 죄를 개념적으로 규정하려 드는 것은 매우 어리석다.
그렇다면 성서에 간음한 여인을 돌로 치려고 모인 군중에게 예수가 한 말은 무슨 의미인가?
내 안에 있는 ‘죄의 본성‘ 을 부정할 사람이 있을까? 기독교는 모든 것을 죄 아래 둔다.
하느님을 의식한다고 하면서도 그 뜻을 따르거나 신의 의지에 일치시키려는 사람이 있을까?
예수를 제외하고는 없다. 순종하려고 하는 사람조차 찾기 어렵다. 모든 인간이 자신의 욕구에 따라
감각적 만족을 추구하고 자신을 합리화하면서 살아가는 경향을 벗어나기 힘들기 때문이다.
선(善)은 이해되는 순간 즉시 실행에 옮겨져야 하지만 자유의지는 실행을 늦추고 이성은 이러한 연장을
묵인한다. 그러므로 죄란 인간이 올바른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것을 이해하고자
하지 않았다는 것 혹은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는 것에 있다. 죄는 인식 안에 있지 않고 '의지' 안에
있으므로 우리는 모두 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존재다. 기독교적으로 볼 때 인간은 자신이 완전성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또한 죄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무지하다.
인간의 본성 깊숙이 박혀 있는 죄의 뿌리는 자신의 힘으로는 해결 불가능한 것이다. 인간의 구원은
신의 은총에 의한 것이지 이성과 자유의지에 따른 인간의 노력, 금욕주의적 실천으로 결코 가능하지 않다.
인간은 스스로 절대적인 존재가 될 수 없다. 신과의 올바른 관계를 정립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기독교는 죄를 인간의 이성이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적극적인 것으로 규정하고 죄의 사함을
보증하는 역설에 대해 이야기한다. 신이 죄의 용서를 통해 인간에게 화해를 제안한다는 것! 아기 예수가 이 땅에 온 이유이다. 그리스도가 죄를 용서한다는 것을 과연 인간이 이해할 수 있을까?
그것은 믿어야만 한다!
"죄의 반대가 '덕'이 아니라 '신앙'이라는 것은 기독교 전체에 있어서 가장 결정적인 규정의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