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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규원 Jan 29. 2023

<정원을 말하다>

-인간의 조건에 대한 탐구- 로버트 포크 헤리슨/ 나무도시 2012.

    

세상에 평화와 고요함을 원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그러나 이런 동경에도 불구하고 현대인들은

대부분 통제할 수 없는 열정과 충동, 경쟁과 탐욕 속에 피곤하고 지친 모습으로 살아간다. 경제적인

생산활동에 최고의 가치를 부여하고 권력과 물질적 풍요를 누리는 것이 삶의 목표이기 때문이다.

거기에다 더 많은 활력과 도취, 에너지를 욕망하며 찾아 헤매고 다니느라 쉴 틈도 없다.

마음 깊은 곳 어딘가에서 행복을 갈망하지만 현재 삶에 주어진 것과 주어지지 않은 것을 차분하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SNS에는 과시적인 화려함과 즐기는 모습으로 도배되어 있다시피 한다. 그러나

삶은 궁핍함을 견디고 인내심을 가꾸면서 보내야 할 때도 있다. 지나간 시간의 행복에 대한 감사가

있을 때 현재도 행복할 수 있고 미래도 희망을 가질 수 있다. 그러니까 무엇이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는 '카르페디엠'은 현재를 즐기라는 단순한 쾌락주의가 아니다.


사람들은 일시적인 기분전환을 찾는데 돈과 시간을 쓰지만 걱정과 결핍을 차단하지 못한다. 변덕을

부리고 불안해하는 마음이 늘 한구석에 있으니 그 마음을 어디엔가 쏟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 과연

무엇으로 극복될 수 있을까? 저자 로버트 포크 헤리슨은 스탠퍼드대 이탈리아문학과 교수로 유럽

문화사상과 철학, 근현대문학을 종황무진 넘나 든다. 고대 철학자의 정원에서부터 뉴욕의 홈리스

정원으로 나아가며 정원을 둘러싼 지적 탐구를 펼쳐 나간다.

그는 인간이 쿠라 여신에 의해 찰흙으로 빚어졌다는 로마신화에서 실마리를 발견한다.

Cura는 라틴어로 돌봄(마음 씀)과 염려를 뜻하고, 거기서 care가 유래했다. “돌봄은 그 주체를 겸손하게 만든다.”

흙으로 만들어진 인간에게 영혼(생기)을 불어넣게 하는 것은 성서의 창조설화와 비슷하다. 돌보고 걱정도

따르는 일을 하는 것이 인간의 운명이라면? 우리는 흙에서 나와서 결국 본질인 흙으로 돌아간다. 어떤 외양을 취하게 되든지 세상을 보는 방식에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

흙을 경작하거나 돌보는 일은 인간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는 것이다. 요즘 ‘반려 식물' 트렌드는 많은

사람들이 아파트나 원룸 같은 마당이 없는 환경에서 살고 있지만 자연(흙)과 가까워지려는 마음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이 책에서 <정원사의 열두 달>을 쓴 카렐 차페크를 만날 수 있다.

"인간은 손바닥만 한 정원이라도 가져야 한다. 우리가 무엇을 딛고 있는지 알가 위해선 작은 화단  

  하나는 가꾸며 살아야 한다."

땅에 대한 정원사의 열광과 경험에서 차페크는 보편화할 수 있는 윤리적 기본원칙을 말한다. “받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땅에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생명이란 사랑과 마찬가지로 ‘과잉’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가꾸는

이가 더 많이 내어줄 때에야 생겨나 유지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흙에 관한 진실은 국가와 제도, 결혼, 우정, 교육 등 인류의 문화 전체에 대해서도 진실이다.


한편 인간은 동물적 욕구의 하나인 은신처를 휴식의 성소로 만들고자 한다. 정신없이 회전하는 세계 속에서

'고요한 정지점'을 찾는다. 자신의 환경과 관계를 구축하기 위한 영적, 정신적인 에너지를 얻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집이 중요하고 작은 화단을 가꿀 수 있는 전원주택은 많은 사람들의 로망이다.

자연과 가까이하기 위해 개인이 꾸미는 장소인 정원은 어원에서 울타리나 '경계'라는  관념과 연결되어

있다. 꼭 폐쇄된 것이 아니라도 주위의  혼란과 다른 질서, 호젓하고 위요한 공간을  지닐 수 있다면

외양과 변화보다 '깊이'를 생각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정원을 통해 얻는 '고요함'은 에너지의 한 형태라니 놀라운 통찰이다.  


나도 한때는 일상을 벗어나 멀리 여행을 떠나고 싶은 욕구에 사로잡혔었다. 삶을 누리기보다 견디는 쪽으로

받아들였지만 현실을 잘 참아내기 어려웠다. 내면에 새로움과 경험을 고양하려는 갈망이 쌓여 있었다.

모성의 발로에서 감행할 용기를 얻고 버켓리스트 일 순위인 파리로 향하게 된 것이다. 딸과 함께 걷다가 덥고

피곤하면 성당에 들어가서 쉬거나 공원의 벤치에 앉아 꽃과 나무들을 보았다.

어디나 관광객이 줄을 섰지만 비가 뿌린 후 인적이 드물어진 몽마르트르 언덕의 라팽아질에서 얻은

고요한 시간은 그림을 그리는데 쓸 수 있었다. 프랑스에서 파리 다음으로 가보고 싶어 했던

몽 생 미셀에서 오래된 클로이스터를 만났다. '클로이스터'는 수도원의 안 뜰이다. 보통 대성당이나

참사회 성당에 설치되는데 사각형 모양으로 건물들을 서로 연결하기 위해 만들어지고, 지붕이 있는

회랑에 의해 둘러싸여 있다. 역시나 묵상을 위한 공간인  클로이스터에서 평화와 고요함을 맛볼 수

있었다.

여행을 통해 나의 내면에 클로이스터가 있는가?라는 물음이 생겼다. 어떤 대상에 관심을 갖고 돌보기에

앞서 나 자신을 제대로 돌보는(돌아보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이젠 늦둥이 아들이 다 커서 손이 갈 일이

줄었다. 나무와 꽃을 좋아하니까 정원을 가꾸고 싶은 욕구가 크지만 공원을 산책하거나 집안에 화분을 키우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그런데 그림을 그리는 작업이 마음의 정원을  돌보는 일이 될 수 있다.

좋은 시나 그림, 음악은 영혼의 정원을 만나게 해 주는 것과 같으니까. 영혼의 집을 가꾸는 정원사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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