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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규원 Mar 24. 2023

마음껏 사랑한다면,,,

토마스 베른하르트, <옛 거장들>


최근 합스부르크 600년 전시회가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렸다. 벨라스케스를 비롯한 거장들의 작품 속에서 역사적 인물들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커다란 흥미를 끌고 매진 사태였다고 한다. <코르사주>

영화도 보았으니 화려한 왕실의 삶이 직접 보지 않아도 상상이 갔다. 빈 미술사박물관은 이 책에서 이미

익숙해졌다.

음악 평론가인 레거는 특별한 습관을 오랫동안 유지해 왔다. 30년 넘게 그는 이틀에 한 번씩 빈 미술사 

박물관에 와서 틴토레토의 그림 <하얀 수염의 남자> 앞에 있는 의자에 앉는다. 사람들은 레거의 행동을 

미친 짓이라고 수군대지만 그림은 사색과 음악학 연구에 대단히 유익하기 때문이다. 박물관장인 이르지글러가 그를 진정한 의미의 음악연구가며 철학자라고 존경하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레거에게 모든 것이라고 여겼던 아내가 죽은 후 자살하지 않고 우울하고 비참한 삶을 지탱시켜 준 습관

이었다. 그는 여기서 철학자이자 작가인 아츠바허와 대화를 나눈다. 사실은  레거 혼자서 떠드는 것을 들어주고 있다.

래거는 유한하고 무상한 존재인데도 한 인간을 아무런 억제 없이 마음껏 사랑한다면 그 인간은 영원히 살아간다고 믿게 된다고 한다. 건강하고 모든 것에 수용적인 아내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은 그가 질병 속에 생존했기 때문이다. 그는 아내가 먼저 죽는다면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그녀의 뒤를 따르리라 마음먹었다. 그러나 일 년이 넘는 시간이 걸리면서 그는 강해졌고 삶에대해 이전보다 더 깊은 애착을 

느끼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음악이 언제나 내 안에 살아 있으며 그리고 그것이 내 안애서 변함없이 처음 그대로 살아 있다는 사실 때문에 나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


그의 이야기는 주로 위대하고 숭고한 문학과 예술을 형편없는 것으로 만든 데 대해 반감을 표현하고 영혼이 없는 저속함과 감상주의가 예술에 유행하고 있음을 비판하는 것이다. 그중에 포함된 철학자 하이데거는

우스꽝스러운 나치의 속물이다. 그는 무능한 사색가이며 한 세대의 독일 사상가들을 뒤엉켜 놓은 사기꾼

이라는 것이다.

나는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을 읽어볼 필요가 있다는 말을 들었지만 <숲길>이라는 제목에 끌리고

'예술작품의 근원'(고흐의 그림)을 알고 싶어서 읽었다. 그런데  레거는 하이데거를 읽었을 때 단지 몇 줄만으로도 이미 거부감을 느꼈다고 말한다. 자기 주위에 있는 모든 것을 이용할 대로 이용한 협잡꾼에 불과한 자에게 속아 넘어가고 꽁무니를 좇는 사람들을 한심하게 여긴다. 유행하는 철학자뿐 만 아니라 말러, 브루크너 같은 교향곡 작곡자 또 클림트의 그림도 유치한 저속품으로 취급한다.

공감이 가는 이야기인데 좋아하는 음악가 베토벤뿐 아니라 말러를 그렇게 평가해도 되나 싶었다. 그만큼

애정을 갖고 있으니까 철저하게 탐구해서 역설적으로 말한 건지 모른다. 살아가면서 인생을 결코 완성될

수 없는 것으로 바라보는 것처럼 완결되지 않은 작품들에서 최고의 기쁨을 느낀다는 것이다. 그래서 미술사 박물관에 있는 모든 그림들을 견뎌내기 위해서 흠이 되는 허점을 찾아내고자 한다니... 어떻든  저자의 의도나 생각에 비판적인 자세와 거리를 두는 것은 중요하다. 레거의 말대로 경탄에 빠지면 더 이상 벗어나지 못하고 정신이 필요 없이 명청해 질 수 있다. 진정한 이해는 경탄이 아니다.


 “진정한 이해는 인식이며, 존중하는 것 그리고 주의 깊게 고려하는 것”이어야 한다.


세상의 모든 것을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여기는 정신력을 소유하지 않고서는 생존해 나가기 어렵다는

것이 레거의 지론이다. 대부분의 예술작품, 옛 거장들의 작품 역시 베토벤의 <폭풍 소나타>처럼 천재성과

저속성, 그리고 한계를 명확히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고귀한 예술이나 최고의 예술이라고 무조건 떠받들

필요가 없다는 그의 생각에 귀를 기울여볼 만하다. 사실 옛 거장들은 언제나 돈과 명예를 바라면서 작품을

주문한 사람들의 생각에 따라 자동적으로 꾸며 낸 세계를 그렸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단 한 번도 자기 자신과 인간성 자체에 헌신하지 않았고, 진실이 없는 거짓과 허위로 권력에 봉사한 불명예스러운 미술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나는 어느 정도 시대적 한계를 인정하지만 화가의 진심이 담기지 않았다고 다 매도할 수

없다고 본다.  

 "인간적인 것은 모두 저속하다."

아무리 천재적이라 해도 예술작품이 수백 년 동안 칭송되어 온 것은 단지 표면적인 관찰에서 나온 것으로

레거에게 역겨움을 준다. 이런 레거에게는 천성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미술사 박물관 보르도네 홀의 의자에 서너 시간 앉아있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과다. 거기에서 가장 깊은 사색에 잠길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아츠바허는 자유로운 지식인의 전형이 된다. 그는 수십 년 동안 유일하게 한 작품에만 몰두하면서도 출판하지 않고 있다. 레거가 대중들의 반응을 갈망하면서 글을 쓰는 기쁨을 얻는 것과 대조적이다. 또한 레거는 자기 머릿속에 꽉 차 있는 음악 이론에 관한 문제를 끊임없이 말하고 싶어 하는데 비해 아츠바허는 침묵하고 있다. 그는 이론적으로 음악에 전혀 관심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데 귀를 기울여 끝까지 들어줌으로써 레거의 압박감을 해소해 주는 이유는 무엇일까?

레거가  예술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가를 파헤치는 것뿐만 아니라 정치적 사회적 병폐에 대해서도 가차

없이 공격하는 것에 대해 그도 공감하기 때문일 것이다. 레거가 인류는 침묵하면 숨이 막혀 죽었을 것이라고 할 때 나는 나와 같이 살고 있는 사람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당신 외에 더 유익한 사람은

없습니다. 내가 살아남을 수 있는 것도 오로지 당신 때문일 것입니다.”라고 할 때 바로 나에게 하는 말처럼 들렸다. 제아무리 셰익스피어나 칸트라고 해도 잔정 필요로 하는 순간에 아무런 도움도 해답도 줄 수 없다.

예민한 감각과 이성을 가진 사람은 거짓과 위선으로 가득 찬 세상을 누구보다도 견뎌내기 힘들다.

비열함과 뻔뻔함, 우매함을 넘어 사악한 무리들이 지배하려 드는 사회에서는 진실과 사실을 뒤집어엎게

된다. 그래서 분노하며 떠들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사람과 약간 무디지만 주의 깊게 들으며 생각을 가다듬는, 침묵하는 사람이 생기는 것 같다.


소설 속 주인공들에게  매력적으로 이끌릴 때도 있고 그 내면세계를 간절하게 좋아하는 작가를 만나기도

한다.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생각을 이야기하는 특이한 형식의 소설이지만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베른하르트 분신처럼 보이는  레거가 어쩌면 그렇게 나와 친숙한 인격을 형상화해 놓았는지 정말 놀라울

따름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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